에세이 만남

부모님 전상서

南塘 2021. 4. 7. 04:02

글 : 공학박사 이동한

 

2021년 신축년 (辛丑年) 4월 6일 아침입니다. 해빙도 지난봄입니다. 지천에 꽂이 핍니다. 산에는 진달래와 처녀치마, 청노루귀 예쁜 꽃들이 음지에서 또는 바위틈에서 생명을 발칙함을 보여 줍니다. 들에는 검푸른 냉이가 올라오고 싹수 노란 민들레가 피기 시작 합니다. 달이 차서 다시 보름이 되었습니다. 어제 밤에는 속절없이 눈물이 흘렸습니다. 부모님 그리움에 신음인지 밤 새워 얼굴을 떠 올립니다. 아침이 지나면 열병에 지친 아지랑이 춤추는 곳에 어머님 좋아 하시던 철쭉이 필겁니다. 어느 시인이 말 합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서 선암사 해우소에서 실컷 울어라” 했습니다. 그런데 자식은 그러지 못합니다. 너무나 먼 이국땅에 와 있습니다. 정월 초하루 설날을 몇일 남겨두고 양수리에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할 때 그 느낌 그대로입니다. 보고 싶습니다. 하늘만큼 바다만큼 보고 싶습니다. 후회도 많이 됩니다. 너무 없이 살아 뇌경색과 고혈압 지병을 가지고 사신 어머님을 병원조차도 제대로 모시지 못해 너무 일찍 자식들 곁을 떠난 것 같아 평생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제 어린 시절부터 앉으나 서나 걱정하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날의 시련은 여자의 일생보다 더 아프고 아픈 세월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은 봄이라 진달래 복숭아 꽃 살구 꽃 어울려 희희낙락 합니다. 그래서 저는 시골 밭둑에 상사화를 심고 이별초를 심고 옥잠화를 놓았습니다. 어머니 그리울 때 보려구요. 일년에 한 번씩 보려구요. 소천하신 30년을 그렇게 해 왔습니다. 그게 무순 소용 인가요? 살아생전에 식은 밥 한술이라도 정성스럽게 해야 하는데 게신 그곳은 어떤가요? 행복이 있는 천국인가요? 극락인가요? 알 수는 없지만 이곳보다는 좋은 세상인 것을 빌어 봅니다.

 

물이 흐르고 하루하루 매일 똑 같이 가지만 늘 그랬듯이 의미를 남기면 살고 싶습니다. 이제 자식도 이순이 넘은 나이가 되어 또 다른 자식이 잘되기를 마음 조이며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 그리고 철이 없는지요. 어느 날 아들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이 놈아 아들아 너도 나중에 자식 가져 봐라 아빠와 엄마 심정을 알 것이다.” 그렇습니다. 저도 부모님 살아 생전에 깊이 깨달지 못했습니다. 후회해도 돌이킬 수 있으면 못 다한 효도를 다하고 싶지만 방법이 업습니다. 한시외전에 나오는 고사에 이르기를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대), 子欲養而親不待(자욕양이친부대)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고 하나 바람이 가만두지 않으며 자식은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간단한 이치를 체감하지 못했을까? 바보 자식이 부모님 여위옵고 철 지난 후회를 했습니다. 우리 어머님 존경하며 사랑 합니다. 이 자식이 박사(博士)가 된 것도 어머님의 정신을 받아서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지식인이 되기를 희망한 어머님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소천하신 이후에 자식이 걱정할까 하여 꿈에서도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신 어머님입니다. 아들은 마음과 심장에 어머님 마음을 담고 살아갑니다.

 

어머님을 먼저 저세상으로 가시고 홀로 이십년을 사시다가 불치의 암으로 자식 곁을 떠나신 아버지, 큰 유언을 남기지도 않으시고 쓸쓸히 요양병원에서 임종을 지켜 본 자식은 말을 잊었습니다. 살아 온 서러움 보다 아버지의 소천이 더 슬프고 하늘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아버지께서 살아오신 날들을 더듬어 보기도 했습니다. 경상도 안동 땅 양반 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고 피폐한 조국에서 잘 살아 보겠다는 일념은 목수 일을 하던 제 나이 아홉 살 때 사고 이후로 버려진 삶을 살아오신 아버지입니다. 자식들 학업과 앞날을 챙기지 못해 자식 모두를 학교의 장애자로 만들었지만 자식들 모두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현재를 살고 있습니다. 형제 모두가 넉넉한 삶은 아니지만 부모님 보다 세상을 먼저 떠난 남동생 둘 보다는 효자와 효녀라고 생각이 됩니다. 형제들의 가슴에 한이 남아 있다면 아버지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며 아버지의 보살핌이 미흡해서가 아니며 아버지의 사랑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세상은 누구나 자신의 복은 스스로 가지고 태어나는 법 입니다. 올바른 노력과 살아 내겠다는 의지와 방법의 문제일 뿐입니다. 자식들 위해 더는 안타까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상의 이치가 어디 순리를 어겨서 될 것은 없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부모의 정과 내리 사랑은 자식의 치사랑 보다는 아름답고 위대한 것입니다. 오늘도 부모님이 잠들어 게신 양수리 북한강과 남한강은 한강으로 합수가 되어 서울로 수원으로 흘려 듭니다. 자식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들은 알고 있습니다. 장남인 제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절을 찾아 수미단 아래에서 축원을 기도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식에게 학문과 부(富)를 물려주지 못해서 미안해하신 마음도 알고 있습니다. 살아오신 날들을 후회를 숨겨 오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들입니다. 가끔은 원망을 했지만 깊은 마음은 아닙니다. 십수년전에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인 것 인에 감사 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면 됩니다. 장관 아버지, 국회의원 아버지, 의사 아버지, 판사 나 검사 아버지 또는 큰 기업의 회장과 사장 아버지 등이 아닙니다. 그냥 저의 아버지이면 됩니다.

 

가끔 딸에게 손 편지를 받습니다. 아마도 다른 아버지 보다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편지는 아무도 없는 서재에서 밤에만 읽습니다. 그 이유는 혹시 딸이 전하는 글로 인해 눈물을 보일까 해서입니다. 자식 앞에서 약해 지고 싶지 않은 부모의 마음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과 같을 것 입니다. 삼년 전인가 아들 녀석이 손 편지를 책상에 올려놓았습니다. 편지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자는 부모님께 드린 손 편지는 군 복무시절에 올린 수십통의 편지일 것입니다. 어린 나이 또는 사회에 나와서는 단 한번도 마음을 담아 편지를 올린 기억이 없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십년입니다. 이제 이순이 넘은 나이에 세상에 게시지 않은 부모님께 전상서를 올리는 바보입니다. 부모님 내리사랑으로 용서해 주세요. 명심보감에서 “時曰 父兮生我하시고 母兮鞫我하시니 哀哀父母여 生我勞하다 欲報深恩인대 昊天罔極이로다.” 시에 이르기를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아아 애달프다 부모님 이시어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고 애쓰고 수고하시었다. 그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넓은 하늘도 끝이 없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남은 공양은 허울일 뿐입니다. 아무리 공양을 잘한다 한들 소용이 없는 것이라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지난 설에는 제사 상 상조차 올리지 못했습니다. 부모님를 모시는 제사에는 슬픔과 엄숙함을 다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죄스러움이 가득합니다. 납골로 모셔서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산소가 없어 봄이면 고운 꽃과 함께 하지 못함이 더욱 마음이 아파서 고향 제천 송학 무도리에 언제나 찾아와 보시라 봄에 피는 자약, 튜립을 심고 여름에 피는 백일홍, 채송화, 봉선화, 과꽃, 백합도 심었습니다. 가을에 오실까 염려하여 국화도 심었습니다. 겨울에 오실까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도 심었습니다. 자식들이 없는 고향 땅이라도 오셔서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쉬다 가셨으면 합니다. 거기에는 자식의 마음이 가득 합니다. 이제 이 자식도 이십년 후가 될지 삼십년 후가 될지 어느 날 국화꽃 향기 그윽한 날 보모님을 뵙겠습니다.

 

2021. 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