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유년시절을 보낸 동네의 이름은 영천동이다. 제천역에서부터 의림지를 님북으로 이어 놓은 의림대로는 제천의 중심도로이다. 제천의 진산 용두산 기점으로 볼 때 우측이 영천동, 좌측이 화산동이다. 필자는 스물여섯 살까지 살았다. (군복무기간포함) 영천동중간을 중앙선 기찻길이 지난다. 기찻길 남쪽은 굴다리 밖, 관사의 명칭이 있다. 관사는 제천역에 근무하는 철도 공무원(기관사, 역무원, 철도관리원)의 기거하는 마을이다. 필자의 동네는 제천 남산(정봉산)과 화산동 여우골에서 발원한 시냇물이 마을 중앙을 흐르고 시냇물을 중심으로 삼백마직이 넘는 논과 밭이 있었다. 집집마다 문전옥답이 있는 마을이다. 동네에서 가장 잘 사는 집이 오늘 이야기 주인공 석대 아버지 댁이다. 석대 아버지는 청각장애인이셨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들의 언어, 수화가 알려지 않은 때이다. 석대 아버지와 대화는 온몸과 얼굴에 들어난 감성의 대화가 가능했다. 석대 아버지 집은 그야말로 고래 등 기와집이다. 명절이면 동네 아이들이 모두 인사를 가는 집이다. 설에는 반드시 세배를 간다. 필자의 경우도 동네 친구들과 매년 세배를 갔다. 필자의 기억에 “석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부모님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이 불려서 알고 있는 명칭이다. 어린 시절이라 해도 동네의 크고 작은 소문은 죄다 알고 있다. 의미를 모르는 설(이야기)들도 많다. 동네 친구들은 한 번도 보지 않은 석대를 “석대형”이라 부른다. 석대 아버지는 후처가 있었다. 한국동화 놀부전에 나오는 놀부 처, 파줘 엄마와 같은 분이다. 놀부처와 파줘엄마 지칭 사유가 있다. 장애를 지닌 석대아버지에게 후처로 들어와서 마님이 되었다. 석대 아버지댁은 머슴도 있었다. 그러나 석대 아비지는 부지런하고 성실하신 분이었다. 언제나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하고 게셨다, 가끔은 지게에 산넘미 만틈 뗄감도 지고 오시곤 했다. 인심도 후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무서운 분이기도 했다. 가을 걷지가 끝난 논에는 벼를 건조하기 위해 벼로 메기를 틀어 벼를 묶어 논두렁(논길)에 새워 말렸다. 줄 알이 친 거나 논두렁에 열십자(十)형태로 바라리를 쳐 벼 말리기를 했다. 필자와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은 가을 추수가 끝난 논에서의 추억은 몇 개는 있을 것이다. 동네 친구들과 전쟁놀이를 하려면 은폐물이 필요했다. 줄알이와 바라리는 매우 유익한 은폐물이다. 반면에 농부들에게는 화가 나는 일이다. 필자의 경우도 전쟁놀이를 하면서 “줄알이와 바라리”를 해하여 집으로 찾아오신 석대 아버지께 많은 꾸지람을 듣고 부모님께도 꾸중을 들었다. 꾸중을 듣고 난 다음 날 석대 아버지는 이른 아침에 먹을 것을 들고 찾아 오셔서 필자에게 주시면서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얼굴과 몸으로 이야기 하신다. 또 동네에서는 석대 아버지 신세를 지지 않은 마을 사람은 없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분의 순박한 얼굴이 떠오른다.
석대 아버지 후처로 들어온 마님에게는 아들이 둘있고 딸이 하나가 있었다. 큰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미국서 신학공부를 했던 것같다. 미국서 결혼도 하고 목사가 되어 석대 아버지 집으로 돌아 왔다. 마님께서는 동네 잔치를 열었다. 덩실덩실 춤을 주고 다녔다. 그리고 몇일 후 동네에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석대 아버지에게 시집와서 아들 미국유학까지 마치게하고 둘째 아들 대학졸업, 딸은 고등학교를 졸업까지 시킨 고마움을 져버리고 석대 아버지를 한국에 두고 미국으로 마님과 아들과 딸이 이민을 떠난다는 것이다. 더구다나 석대 아버지 문전옥답 대부분을 팔아서 미국에 살집과 생활비 준비 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드라마에서나 보는 최고 막장극이다. 동네 어른들 그리고 아이들까지 모두 마님을 욕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나이의 필자도 마님이 종전에는 그래도 좋았는데 너무 싫었다. 못생기고 뜽뚱한 할머니가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사람의 도리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간접경험으로 겪게 되었다. 동네 아이들 모두가 마님을 싫어하고 미워했다. 동네 아이들 모여서 마님을 골탕먹일 일을 생각해서 실행했다. 석대 아버지 집으로 들어 가려면 약간의 경사가 있는 곳을 지나야 한다. 때는 겨울이라 동네 아이들은 길에 눈설매를 탈 수 있을 정도 얼음길을 만들었다. 성인 남자들은 넘어질 일이 없다. 당시 여자들은 모두 백고무신을 싣고 다녀서 백발백중 미끄러질 것을 예측했다. 예상은 정확하게 맞았고 다음 날 마님은 엉덩이를 다쳐서 자리를 잡고 누었다고 한다. 그사건 몇질후가 설날이라 동네 아이들은 모두 석대 아버지 댁에 설 세배를 갔다. 세배를 하고 각자 세배돈으로 1원씩을 받아서 차려준 음식을 먹고 있는데 마님이 하시는 말씀, 이놈들아 우리집앞에서 눈설매를 타서 내가 고생하게 되었다고 한소리하는데 모두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그리고 마님과 아들들이 이민을 떠나가 나흘 전에 동네 아이들은 골목길에 구덩이를 파고 인분을 부었다. 그 위에 흙을 덮고 위장을 했다. 그리고 골목 입구와 출구에 서서 어른들이 그곳으로 통해하지 않도록 했다. 이틀 후 마님은 똥구덩에 발이 빠진 것이다. 너무나 고소했다. 그 사건으로 동네 아이들 모두 석대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런데 꾸지람하는 석대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초래 해 보였다. 석대 아버지는 이미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었다. 그시절 환갑이면 상노인이었다. 석대 아버지는 몇칠 후 혼자가 되었다. 그 이후 석대 아비지 댁에는 여자의 모습은 없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난 마님과 아들과 딸은 한번도 찾아 오지 않았다. 세상이 변해서 초등학교 6학년 쯤 석대 아버지는 집과 땅을 팔고 화산동 양조장 옆에 집을 마련하고 여관을 운영했다. 필자가 석대 아버지를 마지막 뵈은 것은 고등학교를 진학한 1975년 봄으로 기억한다. 봄비가 내리는 날 오후였다. 석대 아버지는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대문 앞에서 누구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석대 형”이 그리웠던가? 아님 미국으로 떠난 마님이 돌아 오기를 기다는 모습으로 생각된다. 현재 필자가 미국땅에서 50년전 추억을 소환하는 으미는 미국하늘아래 석대 아버지의 후처(놀부부인, 파줘엄마) 자손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목사가 되어서 만인에게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곳이지, 부(富)를 쌓으면 목사와 그의 가족들이 행복을 만들고 지켜주는 곳이 아니지 않는가? 목사는 신앙을 업으로하는 전문직업인이다. 그래서 더 정직해야한다. 도덕이 직업윤리에 가장 큰 덕목이어야 한다.
석대 아버지는 따뜻한 마음이 넘치는 분이었다. 세상에 어디에 자신을 희생하면서 한스러움을 참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가 사는 이세상에는 마님과 같이 사람의 도리를 망각하고 자신들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가족관계를 파괴하는 사건들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인간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우리집 개다 더 좋아 진다(The more I learn about people, the more I like my dog)”(Mark Twain) 그리고 이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식과 타인에게 주는 최고의 유산은 자신의 부를 나누지 말고 삶의 정신을 나누고 상속하라는 것이다. 석대 아버지를 두고 이곳 미국으로 이민 온 마님과 자식들 외적 인생은 행복했겠지만 아름다운 인생은 없었을 것이다. 석대 아버지의 아름다운 날을 위하여 글을 남긴다.
2021. 2. 18
참고) 제천은 북두칠성이 있는 도시이다. 도시에는 북두칠성과 동일한 7개의 봉우리가 있다. 정봉산(남산)은 북두칠성의 파군성에 속한다. 응성(應星)이라고 하며, 병사에 관한 일을 담당한다. 빛을 반짝인다는 뜻의 요광성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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