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공학박사 이동한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을 말하자면 첫째 태어나는 날이다. 세상과 인연을 맺는 것이다. 어떤 인생을 살던 소중한 생명의 시작이다. 두 번째는 말이다. 세상에서의 생존과 사회성의 관계성을 갖기 위한 말의 시작이다. 아름다운 나와 당신들의 출발이다. 우리는 세상에 나와서 처음으로 하는 말이 있다. “엄마”이다. 두 번째가 “맘마”이다. 세 번째가 “아빠”이다. 의식주 순서대로인 셈이다. 그리고 조금의 세월이 흐르면 인생 출발의 세 번째 첫 입학을 한다. 학교에 가는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는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대한민국의 현실은 과잉경쟁과 줄 세우기 사회에서 각자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입학과 아울러 3개월 이내에 첫 소풍을 맞이하게 된다. 최근에는 어떤 방법으로 소풍행사를 할까? 예나 지금이나 유형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오늘 주제는 “첫 소풍 그날 섬마을 선생님”을 이야기이다. 인생출발 네 번째는 직업을 갖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결혼을 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자식을 얻고 부모가 되는 것이다. 일곱 번째 세상을 정리하는 회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인생이 덧없지는 않다. 살아 보니 살만한 것이다.
필자가 첫 소풍은 초등학교 1학년 봄이다. 정확하게는 1966년 5월이다. 소풍을 간다고 동네가 들썩인다. 동네에는 제법 많은 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동급생인 친구들과 선배들이다. 필자의 어머니 서옥화 여사께서도 설렘으로 가득했던 기억이다. 소풍 몇 칠전 중앙시장 광성상회(성호네 옷가게)에서 때때옷 한 벌에 흰 고무신 한 컬레를 사셨다. 소풍 날 아침 미장원까지 다여 오시고 예쁜 한복을 곱게 차례 입으셨다. 필자의 기억에 필자의 결혼식 전까지 모친께서 한복으로 곱게 차례 입은 모습은 처음이고 마지막 모습이었다. 철없는 자식으로 효도한번 제대로 못한 세월이 원망스럽다. 정성스럽게 싼 김밥과 과일 그리고 과자와 사이다(칠성사이다) 등 한보자기 싸들고 등교를 했다. 천만 다행인 것은 가까이 있는 동명초등학교와 소풍일자가 겹치지 않아서 이다. 동명초등학교가 소풍과 운동회 행사를 하는 날에는 영락없이 비가 오기 때문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동명초등학교는 작은 산을 정리하여 학교를 지었다고 하는데 마주보고 있는 옥녀봉과 성산의 신(神)께서 노하셔서 비를 내리게 한다는 것이다, 지워진 설(說)이건 내려오는 설(說)이건 비가 내리는 것은 맞는 말이다. 소풍장소는 의리지이다. 제천에 소재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봄과 가을 소풍지는 의리지 솔밭공원이다. 솔발공원은 의림지 본 저수지와 제2 의리지 신저수지 사이에 약 10만평정도의 자연 솔밭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세명대학교 정문 진입로 도로가 개설되어 있으니 곳곳이 분위기 있는 카페들이 조성되어 있다. 필자의 남당초등학교에서 의림지까지는 약 4.5㎞ 이다.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도로를 따라 1200에서 1400명 어린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이동을 한다. 소요시간은 1시간30분에서 2시간 정도 소요되었을 것이다. 강아지 거름으로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어린 마음에 의림지 둑에 올라서면 무서움이 가득했다. 저수지 물색이 너무 밝고 깊어 보이고 안전 펜스도 없던 시절이라 두려움은 극에 달한다. 노송이 우거진 깊은 소나무 골을 지나면 큰 돌 작은 돌 너덜지대가 있다. 지금은 모두 공원으로 개발되어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소나무 지대에서 학년마다 위치를 정하고 반별로 식사를 하게 된다. 그러나 곧장 마을로 묶어 식사를 하게 된다. “성호, 호준, 덕현, 창규네” 등과 같이 식사를 한다.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역시 칠성 사이다이다. 탄산수를 먹어 보는 것은 소풍이나 운동회 때만 가능한 것이다. 봄 소풍은 5월 초,중순에 실시함으로 아이스케기 장사도 있어 운 좋으면 얼음 막대기 하나 얻어먹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보물찾기”를 한다. 식사시간에 선생님들이 보물(선물)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돌과 나무 그리고 숲속에 숨겨 둔다. 부모님들은 자식들과 점심식사는 뒷전이다. 선생님들의 동태를 유심하게 살펴서 보물쪽지가 숨겨진 위치를 파악해 둔다. 점심식사가 끝나면 학년별로 모여서 보물찾기를 한다. 보물은 요즘같이 “핸드폰, 아이비스, 게임기” 같이 고가제품이 아니라 “연필, 공책, 필통, 색연필”과 같은 학용품과 “전” 같은 참고서를 지급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419와 516을 넘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경제 환경에서의 교육인프라는 의무교육 시행 자체가 다행인 시절이다. 보물찾기는 필자는 꽝이었다. 어머니께서 찾아주신 행운권 한 장이 있어 너무나 행복했던 기억이다. 기억에 보물로 받은 선물은 “필통”이었을 것이다. 보물찾기가 끝나고 장기 자랑시간이다. 반별로 선발하고 신청을 받아서 노래와 춤 그리고 악기(당시의 악기는 하모니카, 피리, 아코디언)이 전부였다. 필자는 연극을 좋아했다. 그런데 연극 장기자랑이 없었다. 어머니 손에 떠밀려 노래를 불러야 할 처가 되었다. 필자는 노래를 정말 못한다. 한국에이며 모국어인데 발음이 좋지 않다. 성대구성에 문제가 있다.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도 지명이 되었으니 노래를 해야 하는데 아는 노래는 단 하나밖에 없다. “섬마을 선생님”이다. 1966년 방송된 KBS 라디오 드라마 <섬마을 선생님>과 동명의 주제가였던 이 곡은 드라마의 인기를 타고 발매 일주일 만에 히트했다. 노래가 히트하면서 영화도 만들어졌다. 1967년 개봉한 김기덕 감독의 「섬마을 선생」은 박춘석이 음악을 담당했다. 당연히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 영화 주제가가 됐다. 이경재의 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는 오영일, 문희, 이낙훈, 안은숙 등이 출연했고, 영화 촬영지인 인천 웅진국 자월면 대이작도에는 촬영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다.(지식백과) 노래를 불렀다. 노래의 3형식 음정과 박자 그리고 가사까지 따로국밥이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불렀다. 모두 앞에 서서 말하고 노래하는 것이 좋았다. “첫 소풍 그날 섬마을 선생님” 그 후 30년이 지나 대이작도 섬마을 선생님 촬영지를 방문했다. 노래 가사는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19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 마오., 구름도 쫓겨 가는~ 섬마을에~,무엇하러 왔는가 총각 선생님, 그리움이 별~처럼 쌓이는 바닷가에, 시름을 달래보는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떠나지 마오.” 필자는 잔잔한 첫소풍에 관한 잔잔한 추억이 있다.
이민생활 4년차에 가끔 들어 보는 “섬마을 선생님” 이미자 선생의 목소리가 아닌 신인가수 류원정의 목소리로 듣는다. 세상은 변했다. 천금 같다던 이미자 선생의 목소리 보다는 신세대 가수들이 부르는 트롯이 듣기 좋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여덟 살 소년은 이제 이순 다섯을 바라보며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향해서 매진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기회를 만들어 초등학교 동창생 앞에서 “섬마을 선생님”을 꼭 불려 볼 것이다,
20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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