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만남

경기엣 길 문수봉, 성지순례 너울 길을 가다

南塘 2020. 7. 5. 13:35

나는 건강회복을 위해서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돈 많은 부자나 돈 적은 서민이나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한다.’ 너무나 평범하고 부담이 없는 말이다. 혹여 돈 걱정 많은 친구에게 돈은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잘 있으니 너의 인생과 건강이나 걱정해라, 참으로 옳은 말이다. 산은 매번 거기에 변함없이 있는 것이다. 나의 관리소홀로 나의 욕심으로 나를 잃어서 산을 찾을 뿐이다. 몇 달 동안의 노력으로 몸이 많이 회복 되고 있다. 오늘은 그동안 몇 차례 미른 용인 산 너울 2길 성지순례 코스를 간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용인시 양지면에 위치한 은이 성지에 도착 했다.  
  
   은이 성지는 한국최초의 천주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유년시기를 보낸 숨겨진 동네 ‘은이’ 마을로 사제서품 후에 사목활동한 장소로서 한국 천주교회 사적(史跡)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이곳에는 김대건 신부 기념관과 당시의 성당이 있으며 주일에는 미사가 집전되고 있다. 오늘 걸어야 할 길 ‘산너울 2길, 은이성지 순례길 16㎞는 병오박해(1846년)때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 후에 신도들이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미리내(은하수) 성지까지 지게에 싣고 운구한 길이다. 순례길이 편하지는 않은 해발 400m~500m가 되는 마루금을 지나야하고 신덕고개, 망덕고개, 애덕고개를 오르고 내려야 한다. 신덕과 망덕과 애덕은 천주교의 3덕을 각각의 고개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은이성지에서 미리내 성지까지의 순례길을 삼덕길이라고 한다.  
  
  어제밤 내린 비로 아침공기와 바람이 상큼하고 시원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오가는 산객이 없는 고요한 산길이다. 숲길을 지나 언덕을 오르고 쌓인 낙엽을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무 사이로 소소한 여름 햇빛을 즐기면서 길을 걷는다. 작은 내에 소담스런 폭포를 만날 때 나는 산에 사는 선인으로 돌아 온 느낌이다. 신덕고개에 다다르니 지난 5월에 독조봉부터 칠봉산, 신덕고개, 형제봉, 된봉까지의 산행 때와 달리 고개에 천주교 기념물과 주변이 목재 데크로 잘 꾸며져 있다. 칠봉산에서 곱든고개를 통과하고 문수산 정산을 향해서 걷고 있다. 산위로 올라온 바람은 나를 숙여하게 짓누른다. 내 발자국 소리에 180년 전 9월 어느 날 몇 분의 신도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지고 맨발같은 짚세기 싣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험하고 캄캄한 산길을 걸어 미리내까지 찬송을 부르면 이동했을 것이다. 성경은 아니지만 아파치족의 격언에 ‘내 앞에서도 뒤에서도 걷지 마라, 내가 따르지도 인도하지도 않을 수 있으니 내 옆에서 걸어라 우리는 하나다’ 젊디젊은 꽃다운 나이에 자신이 꿈꾸던 복음화를 위해 순교한 청년 김대건 신부의 사상과 철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사리 고개를 지나 애덕고개에 다다른다. 명품 순례길을 조성하는 작업이 한참이다. 용인시에서는 산티아고 순례길과 같은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은이 성지를 출발하여 3시간30분이 경과 후에 미리내 성지에 도착했다. 오늘 내가 걸어 온 길은 신덕송(信德頌)의 한구절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진리의 근원이시며 그르침이 없으시므로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나이다’ 당시의 절박을 같이하며 신앙인으로 돌아 온 모습이다. 미리내 성지의 ’미리내’는 은하수(銀河水)의 순수 우리말로서 시궁산(時宮山 515m, 神仙峰으로도 전해짐)과 쌍령산 중심부의 깊은 골에 자리하고 있다. 골짜기 따라 흐르는 실개천 주위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점점이 흩어져 살던 천주 교우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호롱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보석처럼 비추이고, 그것이 마치 밤하늘 별들이 성군(星群)을 이룬 은하수(우리말 ‘미리내’)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아름다운 우리의 옛 지명이다. (미리내 성지 홈피)  
  
   산행장비를 정리하고 복장을 정돈한 후에 김대건 신부의 묘역 참배한다. 신도는 아니지만 역사의 한 시대에 선구자였던 성인들 모역에 기도하는 초(컵초)를 정성을 들려 켜 본다. 그리고 한국순교자 79위 복자 시복 기념 경당 앞에서  한 페이지 역사를 되새겨 본다. 역사적인 고찰과 분석이 필요하지만 종교에 문외한이 내 작은 소견에 15세기~16세기 유럽은 가난한 국가들이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해양을 통해 식민지 시대를 만든 그들의 배경에게는 천주교의 철학과 사상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 조선 성종임금 때(1469~1494) 천주교가 전파되었다면 조선과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공자와 맹자사상을 기반으로 중국보다 더 철저한 유교국가 조선의 변화는 긍정적인 시너지로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에 상상할 수 없는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민족에게 나라를 침탈당하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조선 최고의 르네상스시대인 정조대왕 때에 천주교를 받아 드렸다면 을사조약에 이은 경술국치인 한일합방은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교회의 참뜻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인데 시세에 교회는 이익을 우선하는 기업경영과 같다. 언론보도를 통해서 일부 목회자, 신부들의 일탈과 부도덕 그리고 성폭행 등과 같이 부끄러운 민낯에 실망을 금치 못한다. 교회는 교회의 자산을 늘리는 것 보다 교회와 신자,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를 보호하고 사랑을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교회의 참됨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교회를 통해서 전하는 것이다. 근세 교회들은 참뜻에 다할까? 정말 하나님에 복종하나? 180년 전(前) 김대건 신부의 주검을 엄수한 은이성당부터 미리내까지 그때 가을날에 험한 길을 걸어 그분을 모신 성도님들 살신성인 행동이 진정한 교회의 마음이 아닐까? 존경심이 절로 든다. 한국천주교 103위 시성 기념 대성전에 들려 한국인의 마음으로 우리나라를 행복한 자유대한민국으로 지속 성장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2020년 7월 5일 
 
수원 궁촌제에서 
 
새남터 : 조선시대는 연무장(鍊武場), 지금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앞 한강변의 모래사장으로, 일명 ‘노들’ 또는 한문자로 음역하여 ‘사남기(沙南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