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만남

성적표(통신표) 기억을 더듬어,,,,,

南塘 2018. 12. 2. 15:20
성적표(통신표) 기억을 더듬어,,,,, 
 
    통신표 ? 해방이후 국민학교에서 학생의 기말고사 성적과 학교생활을 기록하여 가정에 보내는 통신문으로 그 시절 우정 인프라와 인터넷 등, 통신 인프라가 미흡하여 학생을 통해 부모들에게 전달하는 제도 였다. 이 통신표는 그야 말로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라 많은 에피소드와 이야기 거리로 넘처 난다.대부분의부모들은 없는 살림에 자식을 학교 보내고 그 고생한 결과는 통신표를 받아 보는 것이라 결과에 따라 환희와 분노가 극명한 차이를 보인 것이다. 나의 경우 중학교 1학년까지는 통신표를 받는 순간 걱정과 긴장 그리고 두려움에 대상이였다. 그것은 너무도 성적이 안좋았던 그때 이야기다. 국민학교부터 중학교2학년까지 너무도 공부를 못한 열등생 이였던 나의 초년시절 시대적 환경적 요소에 관하여 스스로 위로하고 이해가 필요하다.  
 
   “개천에서 용 난다” 5060 세대는 죽을 정도의 노력이면 가능했던 이야기다. 현재는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의 정도에 따라 학교교육, 사교육이 성장기 아동들 그리고 청소년들의 역량은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다. “개천에서 용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최근 장안에 화제가 된 책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이야기도 결론적으로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출구 전략인 정책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가난한 가정에서 정말 입에 풀칠과 겨울이면 얼어 죽지 않을 만큼의 연탄, 아궁이에 넣을 땔깜을 마련라는데 많은 시간을 보낼 수 밖없었다.핑게 같지만 사실이다. 나는 6살 이전에 부친과 조부로 부터 한문을 배웠다. 천자문을 쓸 정도가 되었다는 것인데, 국민학교를 진학해서 한글 깨우침이 늦었다. 숫자에도 밝지 못해 산수에 대한 이해력과 응응력은 바닥 수준이였던으로 기억한다. 학기 말이 되면 선생님께서 나누어 주시던 통신표(성적표)수우미양가로 표시되어 “수와우”가많으면 만족한 표정으로 또 “양이나가”가많으면 부모님께 보여드리는 것이 걱정이 되어 울상을 지었던 성적표였다. 나는 특별하게 좋아하는 과목도 없었다. 공부에는 애초 흥미도 없고 취미도 없었다는 것이 아주 정직한 고백이다. 국민학교 때 그래도 약간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특활 활동 이였는데,3학년부터 6학년까지연극부에서 나름 열심히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국민학교 3학년 생생한 기억은 통신표 기록된 선생님은 의견은 “책임감이강하면 봉사정신이 높고, 연극부 활동에 재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은 통신표 받는 순간부터 두려움에 떨어야 했으면, 부모님께 보여 드린 즉시 선친으로부터 사망에 이를 것은 뻔한 이치라 어머니께 보여 드리고 선치의 도장을 몰려 찍어서 선생님께 제출한 올바르지 못한 행동은 국민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지속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선친께서는 학교로 방문 선생님가 상담을 통해, 내 성적을 모두 알고 게셨는데도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선친께서는 “동석아” 꿈이 뭐여, 장래에 무엇이 될거야하고 내게 질문을 하시면 꿈이 없다고 했고 배골치 않고 사는게 꿈이라고 했다. 이런 아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셨을까 ? 선친께서는 우리 집안은 진성이씨의 학자 집안이고 가풍이 있는 집인데 자식은 왜이리 공부를 못할까 혼자 말로 수없이 하셨던 것이 지금도 내 뇌리에는 윙윙 한다.나는 그런 선친에 독백을 받아 들리지 않았고 가정이 행복하지 않은 당시에는 어린 나이부터 반항심이 있었다. 나는 매번 혼자 결심하고 결심했다.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고 반대로 반대로 살겠다. 책임감을 가지고 어떤 일이든 끝까지 한다. 나의 일에 책임을 지고 누구에게도 책임을 미루고, 핑게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나의 국민학교 때 꿈과 희망은 파일렛이 되는 것 였다. 아마 그 당시 내 어린 눈과 가슴에는 선친의 사업실패와 식구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픔이 너무도 커서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국민학교 시절이 꿈이 파일렛이라서 수 많은 나라를 방문했던 것은 아닐까 ? 뮈 걸신 들렸다고들 이야기 하는 말이다)
나는 국민학교 연극반에서 칭찬도 받고 재능도 있다고 “한시동선생님께서(1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 말씀 하셨고, 우리 집 형편을 아시고서는 많은 사랑을 해 주셨던 선생님은 모친과 같은 연세에 제천여자중학교 동창인 그분 이였다. 이제 예순을 바라 보는 나이에 그분이 가끔은 생각이 난다. 
 
   나의 국민학교 성적으로는 중학교 시험 제도가 추첨 제도로 변경되지 않았다면 나는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교육정책의 대변화로 제천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적은 매 한가지 반에서가 아니라 전교 꼴지에서 30등 이내였다. 그러던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서 학습. 학습에 모든 것을 걸었다.2학년부터는공부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친구들의 참고서를 빌리고 선배들의 노트를 빌려서 공부에 집중하였다. 신문 돌리는 일도 멈추고 살기 위해서 공부에 전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제천 중학교에는 우열반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때 전교 520등~600등까지 모아 둔 2학년7반, 이 반은 공부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머리도 나쁜 학생들로 구성된 학급이라는 오명이 있었다. )  
 
  2학년 기말시험에서 나는 전교 11등을 했다. 그리고 3학년이 됨과 동시에 전교1등~60등까지 구성된 3학년8반에 편성되었다.나는 새 교과서 없이 철저한 예습 그리고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기록하는 페이퍼와 선배들 노트에서 본 기출 시험문제를 정리하는 등, 노력과 집중하고 부족한 것은 친구들의 참고서를 빌려, 참조하는 등, 첨삭을 겸하면 공부를 했다. 중학교 3학년 “박진수영어 선생님”으로기억하는데 나에게 과외를 하라고 하셨다. 영어과외 당시 약 1,500원/월비용 이였는데 우리집 형편에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제안이라 뭉게고 몇일을 보내 후 선생님에게 야단도 맞았던 그리고 서러운 추억이 있기도 하다. 하기사 그시절 교사들의 월급으로 생활은 넉넉치 않아 대부분에 교사들이 과외를 하다고 학생들은 쉬쉬하면 이야기가 되곤 했다.  
 
   나는 3학년기말고사와 졸업시험에서도 전교 5등에들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통신표를 선친 앞에 내 놓고 구미공고, 금호공고로 유학을 보내 달라고 했는데 가정 형편에 그건 꿈이였다.  두개의 공고는 박정희 정부 시절 새마을 운동과 중공업 입국을 위해 정책적으로 만든 학교이며, 전국에 우수한 인재들이 모였던 학교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 생각 해 보면 그 두개의고등학교에진학하지 않은 것이 하늘에 뜻이였고 나에게는 오늘 날 공인이 되는 아주 중요한 의사결정이 간난이라는단어로만들어 졌다. “개천에서 용난다” 맞는 이야기 였다. 그러나 지금은 틀린 속담이 된 말이다. 학교 공부도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선택가 집중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만에 공부방법을 만들어야 한다. 다른 말로 TOOL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만에 습관을 만들고 이행해야 한다. 지금 많은 젊은 청년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정말 전략적으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나에게는 인생 기술서란 것이 있다. 이 기술서는 90년대 만들어서 좌우명 대신 생활에 기본이념으로 실천해 온 나만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에 성적표,우수 통신표를 만들려면 자신을 편하게 하면 안된다. 좌우명을 만들고(중학교, 고등학교), 인생에 목표를 세우고(대학교, 신입사원), 인생 기술서를 만들어 실천하고(중견사원, 40세가 넘으면), 자신 인생 성적표, 통신표를 위한 도전과 실행은 멈추어서는 안된다.  
 
   이제 나의 60세 통신표는 The choice best 5, The choice mistake 5 의사결정에의한 성공하는 60대가 되는 10년의 인생 계획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