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산 산행기
2010년9월18일, 맑음, 삼성전자 성전회 가족등산행사 41명 중 우리 팀은 6명 + 1명
천태산 research한 자료부터 소개해 본다.
천태산은 고려시대 천태종의 본산이었기 때문에 산 이름도 ‘천태’가 된 영동의 명산으로 ‘충북의 설악’이라 불릴 정도로 산세가 빼어나다. 뛰어난 자연경관과 잘 정리된 등산로, 그리고 주변에 이름난 명소가 산재해 있어 등산동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여름철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기암과 각종 수목의 푸름과 단풍이 절정을 이루며, 천년사찰인 영국사(寧國寺)가 자리 잡고 천년역사의 숨결이 곳곳에 배여 있다.
등산코스는 : 주차장 →용초폭포 →은행나무 →송판서묘 →암벽 →정상 →헬기장 →영국사로 돌아오는 산행거리 4.6km, 약 3시간
20분 소요된다. (자료 영동군청 홈페이지 참조)

[ 6 Plus ]
20년 전 한마음산악회를 운영할 때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산이다. 오늘 그 희망과 설래임으로 그를 만나러 간다. 회사 정문 주차장에서 멤버를 만나(민석, 재범, 영순, A. B. C) 버스에 오른다. 추석연휴가 시작 되는 토요일이라 주차장은 한산하다. 산행 에 나선 사람은 모두 41명, 버스는 동탄을 경유, 기흥 IC로 진입하여 맑은 가을 들녘 을 달려 오전 10시 20분 영국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손에 잡히 듯이 천태산 정상이 가까이 보인다. 영국사로 향하는 길 설레는 사람들이 많은지 앞서가려는 모습이다. 주차장에서 계곡을 끼고 10여분을 지나면 3단 폭포(용추폭포)가 나온다. 수량이 많이 있지 않아 폭포수의 아련함은 덜하지만 그런대로 인증샷을 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폭포를 지나 약 5분을 더 걸으면 영국사 매표소가 나온다. 모두 산에 가는 사람들인데, 영국사 입장료를 받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매표소 앞에는 50미터 정도에 각 등산동호회에서 매단 리본들이 마치 티벳 사원을 연상케 한다.

[ 영국사 매표사 앞]
영국사 앞 은행나무는 수령이 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것과 같이 나무의 지름이 6미터에 이른다. 나뭇가지에 덩근 은행열매가 많이도 보인다. 가을을 알리는 전령사와 같다. 은행나무를 끼고 오른쪽으로 오르면 A코스를 통해 정산으로 오르게 된다. 정상은 은행나무부터 1.6KM이다. 600미터를 올랐을 때. 첫 번째 암벽이 나타난다. 경사각도는 70도 정도에 높이는 40여미터가 됨직하다. 그리고 곧장 100여미터의 제2 암벽이 기다리게 된다. 따가울 정도의 태양 빛과 땀이 어울려져 몸이 더워질 쯔음 2암벽 쉼터에서 계곡을 내려 보는 전경은 과히 일품이다. 물론 수많은 산들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지만, 산마다 그 묘미와 전륜을 각기 다름이다. 마치 월악산 영봉에 올라서 송계계곡을 보는 작은 세트장 같기도 하다. 숨을 돌려고 200미터 더 올랐을 때 100미터나 되는 직벽이 앞에 있다. 오늘 산행에 백미가 될 수 있는 코스인데 오른쪽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 오른쪽 우회하는 코스를 선택했다. 산은 올라가는 것 보다 사고 없이 돌아가는 것이 산행에 목적인 것이다. 산을 즐기는 것이지 자연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나의 오랜 경험에서 나는 코스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코스를 돌아 20여분을 오르고 암벽을 통과하여 소나무 그늘아래서 잠시 숨을 돌린다. 같이 온 일행들도 직벽코스를 우회하여 나를 따른 사람들이 꾀나 된다. 산바람에 두둥실 흘러가는 저 구름들 가을 청명 하늘이 내 마음인가. 그대들은 구름인가 ? 오늘 산행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 모두 소중한 인연인데. 숨을 고르고 정상을 향해 간다. 10여분을 오르니 작은 암릉을 지나 능선에 닻게 된다. 등선에서는 우측방향으로 500여 미터를 오르니 천태산 정상이 우리를 기다린다. 바위와 돌 무더기 그 옆에 삼각점 까지, 모두 모여 인증샷을 하고 사방을 들러 보니 손에 잡이는 황학산, 민주지산, 삼도봉, 각호산등 천미터가 넘는 소백의 정백들이 긴 띠를 형성해서 이어져 있다.

[소백정맥에서 본 황학산, 삼도봉, 민주지산 ]
영동은 소백정맥 부터 시작된 등줄기가 호남정맥을 만들어 가는 시발점이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곳이다. 잠시 웃고 즐기고 발길을 돌려 A.B코스와 CD코스의 분기점으로 돌아 왔다. 적당한 그늘에서 배낭을 풀고 점심 먹을 요량이다. 6+1이 모여서 각기 준비해온 음식을 내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1 이영남과장의 MP에서 7080 가요가 산중에 흐르니 라이브카페가 달리 없다. 천상의 시간이었다. 돌아 내려오는 길은 헬기장을 지나 남쪽 능선을 향하다. C코스 분기점에서 다시 D코스를 접어들면 삿갓 모양의 바위와 돛단배 모습의 바위에서면 비행 글라이더를 타는 기분이다. 남사면을 접어들면서 바람도 적지 않게 불어온다. 하산을 시작 한지 30여분을 지나면 전망대 바위가 나온다. 바위틈에 자란 소나무는 잘 가꾼 분재와 같다.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아름다운 연인들이 사진을 남기는 모습에서 지나간 세월의 그리움이 폐부 깊게 스며든다. 하산길을 재촉하여 20여분을 나무계단과 숲속길 을 지나니 계곡에 맑은 물이 우리를 기다린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병에 담아 마셔본다. 맛은 그만인데. 시원함이 부족하다. 이것을 우리는 마케팅 용어로 2%가 부족하다고 표현 한다. 능선을 내려와 영국사 남쪽 초입에 닺으니 부도 2기와 원각국사비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부도 중 영국사 부도의 상륜부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모양이다. 팔각모양 지봉에 중간 원형구가 형성되어 있다. 특이한 모양이다. 그리고 원각 국사비는 세월을 이기지 못한 것일까? 귀부가 내려져 있다. 그리고 비석도 1/3은 파손된 상태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정도까지도 유지된 것이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된다. 영국사는 천태산 아래 고요한 절집이다. 생각 같아서 몇날을 쉬어 가고 싶은 곳인데. 내가 스님도 아니고..... 발길을 돌려 다시 3단 폭포에서 작은 용소에 발을 담구니 하루의 산행이 종료되는 기분이다. 오늘 산행에서 얻은 것은 돌아가는 마음이다. 산은 언제나 겸손한 사람에게만 정상을 허용한다. 산이 낮고 높음에 문제가 아니다. 주차장에 돌아오니 14:40분. 출발이 10:40분이니 점심시간 한 시간을 제외하고 3시간이 소요되었다. 늦은 더위로 산행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행복한 내일과 다음 산행을 기약하면서 영동을 떠난다.
(2010년 9월 18일)
전해오는 이야기 : 천태산 영국사와 공민왕
영동에서 양산쪽으로 악20km 나가면 양산면 서북쪽 지점에 영국사(寧國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는데 이절에는 고려조의 공민왕의 발자취가 서리어 있다. 서기 1361년(공민왕 10년) 11월 원(元)나라의 한산동(漢山童)을 두목으로 하여 일어났던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하기 위해 공민왕은 노국(魯國)의 공주와 대신들을 데리고 피난의 길을 떠났다. 남으로 길을 재촉하던 공민왕은 영동 양산면 지금의 누교리(縷矯里)에 머물게 되었다. 영국사의 그 당시 이름은 국청사(國淸寺)이기 때문에 왕이 부처님 앞에 나가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의 평안을 빌려고 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내린 폭우로 도무지 내를 건너 갈 수가 없었다. 개경(開京)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모두 가슴 아픈 일들 뿐이였다. 성 안의 부녀자와 노인과 어린이들은 다투어 성을 빠져나갔다지만 그나마 피난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홍건적의 무리에 짓밟혀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킨다는 소식이었다. 공민왕이 이곳 양산이 아니라 이천(利川)을 지날 때 이미 홍건적은 개경(開京)을 함락 했고 그 뒤 수개월 동안 사람과 가축을 살해하고 왕궁을 불사르는 등 잔악한 행동이 그칠 사이가 없이 일어 났다고 한다. 때마침 개을 건너 천태산(天台山) 쪽에서 종소리가 울려 왔다. 공민왕은 깜짝놀라 좌우를 돌아 보았다. 「이 부근에 절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저렇게 종소리가 아름다운 절인줄은 몰랐구나」 왕비와 왕자 그리고 대신들은 하나같이 공민왕의 눈치만을 살폈다. 대신 한 사람이 설명 하기를 「저 절은 일찍이 신라 때 원각국사(圓覺國師)께서 세운 절로써 처음에는 만월사(滿月寺)라 하였다가 문종대왕(文宗大王)당시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주지로 온 뒤로 국청사(國淸寺)라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하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공민왕은 눈이 번쩍 띄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문종(文宗)의 아들로 천태종(天台宗)을 일으킨 분이 아닌가 의천(義天)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저 국청사에 올라 국태민안(나라와 백성이 평안함)을 빌어보고 싶었다. 공민왕의 뜻을 알아 채린 대신들은 산에 올라 칡넝쿨을 걷어 오라 일렀다. 그들은 수행원과 인근 마을 주민들이 걷어 온 칡넝쿨을 새끼줄처럼 꼬아서 이를 테면 구름 다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공민왕은 완성된 다리를 밟고 국청사 부처님 앞에 나아갔다. 왕비 왕자 그리고 대신을 데리고 공민왕은 국청사에 올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었다. 그래서 국청사는 공민왕이 다녀간 뒤 왕이 나라안 백성들의 편안함을 빌었다하여 편안할 영(寧)자 나라 국(國)자를 써서 (寧國寺)로 고쳐 부르기 시작 하였으며 공민왕이 칡넝쿨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간 마을을 누교리(樓橋里)라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영국산 부도
부도는 영국사에서 남쪽으로 200m쯤 되는 언덕 위에 있으며,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묻는 탑의 일종이다. 신라와 고려에서 많이
조성되었던 8각당(八角堂)형의 부도이고, 재료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건조 연대는 신라 말에서 고려초인 11세기경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원각국사 유골이 영국사에 안치되었다는 기록이 비문에 남아 있어, 이 부도가 원각국사 사리를 안치한 것
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임금이 옥새를 찍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단정하고 아담한 형태의 부도로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 부도의 전체 높이는 1.76m이다.

영국사 3층석탑
지정정보 :
이 탑은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일반형 석탑으로서, 2중기단 위에 3층으로 만든 몸돌을 세운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원래 옛 절터에 넘어져 있던 것을 1942년 주봉조사가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고, 현재의 대웅전 건물이 향하고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현재 있는 이 탑은 2중 기단 위층과 아래층 돌이 바뀌어져 있어, 옮겨 세울 때 잘못 복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상륜부의 각 구조물에 쓰인 재료는 모두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통일신라 말기의 탑 중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국사 원각국사비
지정정보 :
이 비석은 고려 의종 7년(1154)에 선사(禪師:선종의 법리에 통달한 스님)가 되었고, 명종 1년(1171) 9월 12일 왕사(王師:임금의 스승)가 된 원각국사비 이다 원각국사는 대선사 교웅의 밑에 들어가 아홉 살에 중이 되었다. 선사의 유골은 영국사에 모셔졌으며, 고려 명종 10년(1180) 한문준이 비문을 지어 원각국사비를 건립하였다고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상권에 그 전문이 소개되고 있다. 비몸돌(碑身)은 점판암 1장으로 되었으며, 비문은 총알을 맞아 손상된 곳이 많아 그 내용을 전부 알 수는 없다.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과 비머리(首:비의 갓으로 용모양을 새긴 것)에 있는 네 마리 용은 매우 특이하며, 각 부분의 조각은 그 제작 연대가 뚜렷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영국사 원구형부도
지정정보 :
이 부도는 원각국사비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부도의 확실한 주인공은 알 수가 없다. 둥근모양의 이 부도는 다른 부도에서는 볼 수 없는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또한 아래 위의 연꽃 잎이 한 잎인 점으로 보아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둥근형의 탑몸돌과 팔각형의 지붕돌(屋蓋石)을 서로 결합하여 만든 구조물이다. 지붕돌의 기와골과 합각마루(박공 위에 있는 마루)의 장식은 비교적 무디어 졌다. 지붕돌 위에 정교한 보주(寶珠)가 있어, 각 부분의 형식이 완전하게 존재하는 부도탑이지만, 탑몸돌이 원구형(圓球形)인 점과 상대석에 새겨진 연꽃잎이 그림양식으로 된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는 184cm이다.

영국사 은행나무
지정정보 :
이 나무는 높이가 31m, 가슴 높이의 둘레는 11m이며, 나이는 대략 1000년쯤으로 추정된다. 가지는 2m 높이에서 갈라졌으며, 동서 방향으로 25m, 남북 방향으로 22m정도 퍼져 있다. 서쪽 가지 중 하나는 밑으로 자라서 끝이 땅에 닿았는데, 여기서 자라난 새로운 나뭇가지는 높이가 5m 이상이나 되고, 가슴 높이의 지름이 0.2m가 넘는다. 이 은행나무는 국가의 큰 난이 있을 때에는 소리를 내어 운다고 하며, 이 나무 바로 옆에는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어 충분한 수분을 공급받고 있다. 가을에는 이 은행나무와 주변의 경관이 하나로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며, 격년마다 많은 양의 은행이 열린다.

[ 영국사 은행나무 ]
(참조 자료 영동군청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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