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물과 어울려 선경을 연출하니 관광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에 있는 중원 미륵사지는 월악산 송계계곡 상류에 있는 사적지로서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말, 고려초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며 1987년 사적 제317호로 지정되었다. 미륵사지 내에는 보물 제95호인 5층석탑과 제96호인 석불입상이 있고 지방유형문화재인 미륵리석등, 3층석탑등이 있다.
[기행문]
중원의 숨은 역사 충주 미륵대원사지를 찾아서...... 아직은 봄이 성숙되기는 이른 날이다. 3월7일 토요일 일찍 여장을 준비하여 저녁 6시경 수안보에 도착하였다. 와이키키 호텔에 체크인 후 저녁식사는 뒤로 미루고 온천 사우나 부터 다녀왔다. 그리고 저녁시사는 현대식당으로 갔다. 그곳은 된장찌게가 일품인 집이다.
수안보에 오면 아침,저녁식사는 매번 그 집에서 한다. 다음날 아침 10시 월악산 미륵사지 로 출발하였다. 미륵사지는 수안보에서는 9킬로미터 정도이데 그 곳을 찾아 가는 길목은 나와 같은 40대 이상이며 누구나가 간직한 마음의 고향인 그런 촌락들로 이어진다. 내가 이곳을 찾는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성장한 제천의 행정구역이란 의미도 있겠지만 더욱 강 한 느낌을 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당기는 힘 그 무엇이 작용하는 향수 때문일 것이다.
이번 방문으로 일곱번째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은(수안보에서 미륵사지까지) 가을 걷이가 끝날 무럽에 깨끗한 햇살을 이고 달리면 더욱 마음이 가벼위 지는 그런 곳이다. 지금은 이른 봄이라 농본기를 준비하는 농부들의 분주한 걸음과 농기구의 이동이 잦지만 가을을 생각하며 10여분을 달린다. 아름다운 단풍이 천연의 바위와 어울려 그렇게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 지나는 사람의 발목을 잡기에는 더없이 좋은 드라이브 코스이다. 차는 10여분 달려 월악산 매표소에 닺았다. 입장료는 어른 1,000원 학생 500원으로 다른 국립공원 입장료 보다는 상당하게 저렴하다. 솔치재를 넘으면 멀리 눈에 들어오는 월악산의 위용과 조령 의 줄기 사이로 하늘재가 보인다. 하늘과 닺을 수 있을 만큼 높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늘재를 오르는 길목 옆으로 5,000천여평의 대원미륵사지의 석물 입석이 제일 먼저 찾는 이의 눈길을 맞는다. 이곳은 통일신라 이전에는 삼국의 각축장으로 서로 유리한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한 지역이기도 했다. 그이유는 우리나라의 대륙을 중심축인 태백산맥에서 또 다른 큰 줄기를 이루는 산맥이 소백산맥인데 이 월악산 지역은 소맥산맥의 중심부로 과거 영남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란 것도 예감을 더해 간다. 이곳 대원미륵사지를 중심으로 하늘재와 계립령 그리고 조령등의 재가 있어 과거의 교통수단이 발전하기 전에는 이곳을 경유하지 않으면 영남과 기호지방을 갈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늘재와 계립령의 분기점에 대사찰인 미륵사를 세웠던 의미는 국태민안과 나그네의 여정에 안녕을 기원을 불심으로 지키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이곳 미륵사지를 방문한 것은 그런 연유이고 대중가수인 주현미 월악산을 들으며 달리는 시골 길은 그렇게 찾아도 또 찾고 싶은 곳이 이곳이다. 그저 이곳은 마음이 평안하고 심성을 깨끗이 하는 어떤 정재의 역할이 되고 있는 느낌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미륵사지 초입에 들어 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돌 거북인을 만난다. 이제는 비석의 흔적만 남아 있으나 자연석을 이용한 조각으로 현재까지 그모습과 아름다움은 대단함으로 남아 있다. 단지 비석과 비문는 세월의 업을 덮고 사라졌지만..... 돌거북은 발가락이 다섯인 검은색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고 거북등에는 작은 거북 둘이 그림이 음각으로 그려져 있는데 큰 거북의 등을 오르는 모습이고 그림의 표현은 생명에 대한 영원과 극락 정토에 관한 사상에 의하여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최대의 돌거북을 지나면 오층석탑이 오가는 이의 발목을 잡는다. 이단으로 된 기단과 옥계석의 조형미와 체감률이 떨어져 둔중한 느낌을 받게 하지만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아님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생각되게 한다. 오층 석탑의 높이는 6미터에 달하고 지붕 돌 층급 받침이 5단으로 되어 있고 반전하여 처리하는 등 예술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쓴 흔적이 영역하다. 석탑앞으로 팔각석등 사각석등도 다른 절의 모양과는 달리 수순함의 특색을 갖추고 있다.
특히 사각석등은 복련으로 된 기단과 기둥에는 연꽃 손을 양각으로 그리고 석등 지붕을 받친 네기둥은 사자의 모양으로 측측 되는 모습으로 아주 아름다운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8각 석등은 기단은 앙련으로 등받침은 복련으로 등을 보관하는 몸돌은 하나의 돌을 깍아 만들었으나 지붕돌은 별도로 구조하여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80미터에 이르는 돌거북, 석등, 석탑, 석등을 지나면 환한 낯빛에 잘생긴 모습의 석불 입상을 만나게 되는데 수선함 보다는 순박하고 포근한 느낌이 가득하다. 이 미륵불을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에 그 많은 절집이나 미륵불과는 다른 신라인의 아님 고려의 민초의 모습에 베여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불가 사이한 것은 천년세월의 역사를 답습고도 얼굴만은 이끼 한점 없는 맑은 모습이라는 것에 불가사이라는 단어를 쓸수 밖어 없다. 그런데 이석불의 구조는 화강암 네 개를 이어 올려 몸을 만들고 갓과 좌대를 각각 다른 돌을 다듬어 만든 높이 10.6미터의 거대한 석불로서 둥근 얼굴에 활 모양의 긴 눈썹, 길고 가는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로 밝고 온화한 미소를 뛰고 있다. 웃주름이라든가 앞 가슴으로 끌어 모은 두손의 단정함등이 보는 이의 마음을 너무도 밝게 만들고 이로 인하여 절터가 북향인데고 환한 느낌이 넓게 보이다. 특히 이 석불을 중심으로 ㄷ 자형의 법당 구조에는 잘 알아 볼 수 없는 여래좌상과 원형의 불분명한 보살들의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경주의 석굴암과 같이 둠형식의 석굴이였는지 아님 석벽위에 목조형태의 지붕을 올렸는지는 알 수없으나 현재의 남아 있는 자료들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단지 이곳 미륵사의 이름이며 세워진 연대등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지만 얼마전 안동지역 문화재 답사시 윤교수와 나눈 이야기도 형식에 대한 논의 였지만 짐작만 할뿐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미륵사지에 전하는 설화에 의하며 통일신라 마지막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 일행이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해 금강산에 입산하던 중 이 곳에 들러 석불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도 미륵대원이라 기록이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나 정확한 사료가 없어 이를 입증할 수는 없다. 아무튼 아기자기한 미륵사지 그리고 북쪽의 월악산에는 몇 곳의 문화재가 남아 있는데 모두 덕주공주와 연관되어 있는 그런 내용이다. 합장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는 지난해 가을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 보다는 파릇한 새 빛이 가득 다가 왔다. 그리고 이번 방문에서 아주 바람직한 모습이 있었다 그것은 미륵사지 초입 오른쪽에 있던 토속품을 취급하던 무허가 집들이 있었는데 모두 철거하여 위락 지역으로 이전하여 월악산 관리공단에서 우리 문화유산에 중요성과 보존과 발굴에 대하여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에 흐뭇함이 가득했다. 돌아 오는 길에 충주 탑평리 중앙탑(탑평리 7층석탑,국보 6호)에 걸쳐 오게 되었다. 매번 오는 곳이다. 넓은 평원과 남강강을 끼고 우득 솟은 탑평리 7층 석탑은 우리 나라 중앙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중앙탑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탑은 통일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최대의 전통적인 탑으로 현대에 제시되고 있으며, 2단의 기단은 폭이 좁고 7층으로 된 몸돌과, 옥계석의 체감율과 균형미도 뼈어난 날엽한 탑으로 상륜부에는 복련의 연꽃모양의 조각으로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하고 있다. 탑을 해체 복원하던 1917년 청동거울 2점과 칠합, 은제사리함, 유리사리함, 청동제 유기합 1점등일 발견되기도 했다. 그오랜 세월을 지켜 오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고 역사를 다습고 온 탑에서 그리움과 연모의 정을 느낀다. 몇 카트의 슬라이드 사진을 찍고 옆에 위치한 충주 박물관에 들어 선다.
박물관 입구에는 중원 고구려비가 실 모형으로 만들어져 서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있는 고구려비는 국보 205호로 높이 203㎝ 넓이 55㎝며 1979년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학계에 보고되었다 글자체는 고졸한 예서풍이며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글자수를 알 수 없다. 대략 400여자로 추정되면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로 상당한 중요성이 있으며 이비는 당시 고구려의 남하정책과 신라와의 관계등을 분석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 이기도 하다. 입구를 지나 전시1관에 들어 서면 중원 미륵사지의 모형과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전사자석등등 여러 가지 고문화 유품이 모형으로 조성되어 있다. 지하 전사 2실에는 상여와 목계장을 연상하는 생활상이 전시되어 있고 전실 3실에는 생활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도자기등도 전사되 어 있다. 박물관을 다 보고 나면 2시간여가 지난다. 여행의 기쁨과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같이 해서인지 돌아오는 길 수원이 그리 멀게 느끼지 않게 됨도 이때문인 것인가, 이번 여행은 정말로 즐거운 여행이였고 가족들에게도 좋은 시간의 기회였던 것 같다. 다음에는 고구려비를 반드시 찾겠다고 마음에 약속을 하면 필을 접는다.
1. 월악산 미륵리 절터
한반도의 지형을 말할 때 큰 줄기가 되는 것이 백두대간이다.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다가 태백산 부근에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튼 이 큰 산줄기는 경상도와 충북·전라도의 경계를 이루며 내쳐 남해까지 달려 내려간다. 태백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큰산만 꼽아보아 소백산, 월악산, 속리산 , 덕유산, 영취산 , 지리산 흔히 소백산맥이라 부르는 그것이다. 이런 맥락에 있는 월악산 일대 산줄기는 지금도 충북과 경북을 가르는 중요한 도 경계이지만, 삼국시대에도 나라의 경계를 이루는 분수령이었다. 특히 국력을 양성한 신라가 한강 지역으로 진출하고부터 고구려와 백제는 이 곳을 되찾기 위해 신라와의 전쟁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통일신라 이후에는 전진과 방어의 보루라는 역할보다 영남과 중부, 호서를 잇는 길목으로서 역할이 더욱 컸다. 죽령과 조령이 이 소백산맥을 넘는 중요한 길목으로 꼽히는데, 특히 조령 곧, 문경새재는 조선 초기부터 영남의 관문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교통로로서 한말까지도 그 기능이 여전하였다. 영남이란 말도 이고개의 남쪽이라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1925년전 일제가 이화령에 신작로를 뚫은 이후로 그 기능은 이화령에 내어주고, 지금은 관광지로서 사람들의 발길만이 이어질 뿐이다.
죽령과 조령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이 계립령이다. 죽령과 조령 사에에 있으며 충주와 문경을 잇는데, 지금은 비록 좁은 등산로 수준에 불과하지만, 조령 이전에 개척되어 삼국시대 이래 고려말까지 주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이 곳에 고려 초기에 지어진 대찰 미륵리 절터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북향한 절로 폐사지이긴 하지만, 석물들의 아기자기한 배치와 미륵리 절터의 상징이 랄 수 있는 석불 입상의 환한 모습 덕분에 수선함보다는 순박하면서도 포근하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환한 낯빛의 잘 생긴 석불 (보물 제 96호) 에 제일 먼저 눈을 마주치고 나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석불 앞에 일직선으로 선 팔각석등과 오층석탑 (보물 제 95호) .ㄷ자형 병풍처럼 둘러선 석벽과 오층석탑 옆의 사각 석등, 국내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돌거북 모양의 비석받침, 비록 쓰러진 채이지만 연꽃문양이 도드라지게 조각된 당간지주, 연화좌대도 보인다. 시야를 주변으로 넓혀 보면, 불상 오른편에 법당으로 추정되는 건물터들이 발굴돼 있고, 계립령 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삼층 석탑이 있다. 삼층석탑 주변에서는 군사 시설의 흔적으로 보여지는 건물터와 유적들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이는 미륵리 절터가 이 곳에 들어선 이유를 간접적으로나마 설명해 주는 듯 하다. 고려 말까지도 중요한 교통로였던 이곳 계립령 길목에 큰 절을 지어 오가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했을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길목을 지키는 국방상 요지였던 것이다. 미륵리 절터는 문헌상 기록이 없어 절 이름이나 역사가 분명치 않다. 흔히 미륵사터라 부르는데, 이는 「삼국유사」 에 미륵대원 (彌勒大院) 이란 기록과 「고려사에 충주를 공격해 온 몽고군이 부쉈다는 기록이 있으니 고려 때 조성된 '미륵사' 가 아니냐 하는 심증에서 나온 것이다. 절터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신라 마지막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 일행이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에 입산하던 중 이 곳에 들러 석불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석불 입상은 화강암 네 개를 이어 올려 몸을 만들고 갓과 좌대를 각각 다른 돌로 하여 만든 높이 10.6m에 이르는 거대한 석불로서, 둥근 얼굴에 활 모양의 긴 눈썹, 길고 가는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로 밝고 온화한 미소를 띄고 있다. 특히 얼굴 부분의 석재만 분을 바른 듯 밝은 흰색을 띄고 있어 절터의 분위기를 환히 밝힌다. 옷주름이라든가 앞가슴으로 끌어모은 두손의 표정도 단정하다. 석불 입상 주변의 석벽은 거대한 돌을 이용하여 ㄷ자형으로 쌓아올린 뒤 목재로 지붕을 만들어 올렸던 것인데,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경주 석굴암의 돔형과는 다른 방식이나 근본적으로는 석굴암 석굴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석벽 감실에는 여래좌상과 원형이 불분명한 보살들이 앉아 있다. 오층석탑은 높이 약6m로, 지붕돌층급 받침이 5단이라든지 반전하여 처리한 지붕돌의 전각등에서 전체적으로 석탑의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있으나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률이 떨어져 둔중한 느낌이 앞선다.
2. 사자빈 사사자탑
사자빈신사지석탑 (보물 94 호) * 위 치 :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1002-1
* 고려시대 현종13년(1022) 사찰인 사자빈신사
절터에 건조되어 남아있는 석탑이다. 1935년 보물 제34호로 지정된 이탑은 일반형의 석탑 양식에서 벗어나 기단부에 네마리의 사자를 배치한 특수양식의 탑이다. 상층 기단 네 귀에 하나씩 모두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로 탑신부를 받치고 가운데 에는 비로자나불좌상이 있는 사자빈신사지석탑으로,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화엄사 사자삼층석탑을 떠올리게 한다.
3. 덕주산성
이웃한 조령관성과 더불어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던 덕주산성은 본래 신라 때 쌓은 성으로 고려 때 몽고 침입으로 무너진 뒤 조선에 이르러 다시 정비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무너졌다고 하는데, 현재는 남문, 동문, 북문 등 일부 성터만이 남아 있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떠난 뒤 홀로 남은 덕주공주가 세웠다는 덕주사 옛터에는 생동감은 없지만, 높이 13m에 이르는 덩치가 압도적인 덕주사마애불 (보물 제 406호) 가 있다. 이 마애불은 미륵리 절터의 석불입상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다고 한다.
4. 마애불
* 덕주사 마애불상 (보물 406 호) 위치 :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1-1, 덕주사 마애불은 월악산 남쪽기슭의 덕주사 법당자리 동편의 큰암벽 남쪽에 정면 직립으로 조각된 불상으로 1964년 보물 제406호로 지정되었다. 덕주사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나 현지속전에서 마의태자의 누이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품고 이곳
에 들어 왔다가 자기의 형상을 마애불로 조성하였으며 신라가 망한 후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마의태자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남쪽근처의 미륵리사원에 와서 석굴과 불상을 조영 했다고 한다.
5. 월악산
월악산은 총면적 284.5㎢로서 2개도 4개 시군 9개읍면 34개리에 걸쳐 있는 산이며 해발 1,093m의 월악영봉을 비롯하여 150여m의 기암단애가 치솟아 맹호처럼 우뚝 선 준험한 산세와 웅장함으로 예로부터 영산이라 불리어 왔고 깎아지른 산줄기는 끝을 모르고 내리뻗어 사이사이로 운치있게 자란 청송과 기묘한 암반길을 지나 주봉에 올라 보면 충주호의 잔잔한 호수와 산야풍치가 눈 아래 사위에 전개되고 사방으로 창공이 상쾌하여 진다.
월악산은 산형지세가 천혜의 요새를 이루어 많은 애환을 품고 있으며 송계계곡에는 명성왕후의 별궁이 한때 있었던 곳이기도 하며 또한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마주 보고 망국의 한을 달래고 있다는 미륵사지의 석불입상과 덕주사 마애불상(보물 제406호)을 비롯하여 사자빈신사지석탑(보물제94호), 덕주산성(지방기념물 제35호), 석등 등많은 문화재가 산재하고 있어 천년 명산유곡임을 증명하여 주고 있다.
월악산은 많은 문화재와 사찰을 보는 것 외에도 등산인들에게는 산을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정상모습이 각각 다른 형태를 이뤄 더욱 인기가 있는데 우선 북서쪽 20㎞ 거리인 충주시 달천 부근에서 계명산과 남산 사이로
바라 보이는 월악산 정상은 마치 쫑긋한 토끼귀를 보는 것 같고, 동쪽인 덕산 일월에서 올려다 보이는 정상은 쇠뿔과 같으며, 남쪽인 미륵리 방면에서는 수직절벽이 햇빛을 받아 마치 희말라야의 거봉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또한 서쪽 산행시발점인 송계리에서는 정상이 풍만한 여인의 젖가슴인양 아름다운 자태로 올려다 보인다.
영봉을 동서로 8㎞의 송계계곡과 16㎞의 용하계곡이 쌍벽을 이루면서 맑은 물과 넓은 암반, 그리고 천연수림이 잘 어울려 천하절경을 이루고 있다. 용하계곡이 발원하는 문수봉과 대미산을 넘어 또 하나의 절경을 연출하니, 이것이 바로 단양팔경중 3경이 있어 길손을 끄는 12㎞의 선암계곡으로 충주호로 흘러 장회마을에서 옥순봉과 구담봉이 금수산과 마주하여 서로 자태를 뽐내며 충주호의 푸른물과 어울려 선경을 연출하니 관광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1999.08.1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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