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질경영

최지성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장

南塘 2008. 10. 17. 22:18

 

 최지성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장

'글로벌 장터'의 세계 1등 세일즈맨




별명은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눈’ 이다. 좋건 싫건 남들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다. 최지성(55)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장은 ‘장사꾼’ (혹은 ‘보부상’ ), ‘기동타격대’ , ‘독일병정’ , ‘최틀러’ , ‘딸깍발이’ 등으로 불리운다. 삼성전자에 입사한 지 올해로 꼭 30년째인 최 사장. 세계 구석구석 물건을 팔러 돌아다니면서 ‘장사꾼’ 의 별명을 얻었다.

지난 한해 동안에만 19조원어치의 물건을 판 ‘대한민국 간판 장사꾼’ 이다. 추진력있고 깐깐한 일처리는 그에게 ‘기동타격대’ , ‘독일병정’ 이라는 또 다른 별명을 안겼다. 지난달 9일 오후 2시쯤 독일 하노버의 정보통신(IT) 전시회 세빗(CeBit)의 삼성전자 바이어 상담 부스. 전세계에서 몰려든 바이어와 고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 북새통속에 빈 방 하나를 찾아 1시간 40분 동안 최 사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물건을 팔기 위해 쉴새없이 돌아다녀야한다. 최 사장은 지구촌 장터를 돌아다니기 위해 한해 100일 이상 ‘외박’ 을 한다. 지난 십수년간의 항공사 누적마일리지가 200만 마일에 달할 정도다. 물론 삼성전자 전용기나 외국항공사 등을 이용한 마일리지는 포함되지 않은 수치. 유럽근무 시절 최 사장의 잦았던 ‘무박 3일 출장’ 은 일에 대한 그의 끈질긴 집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1985년 1월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문)의 유럽 지사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지사장이라고 해봤자 삼성물산 독일 프랑크푸르트지사에 책상하나를 얻어 사무실을 둔 ‘1인 지사장’ 이었지요. ‘삼성’ 이나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 모두 세계시장에서 거들떠 보지도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막막한 상황이었어요. 궁리끝에 유럽 각국의 전화번호부에서 ‘전자’ 와 ‘PC’ 라는 상호만 나오면 무조건 견본제품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노르웨이에서 포르투갈까지 유럽 12개국을 구석구석까지 고객이 있다면 안 간곳이 없었지요. 그때 이탈리아 토리노시 인근의 이브레아로 ‘무박 3일 출장’ 을 자주 갔어요. 밤 10시쯤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밤새도록 달리면 다음날 아침 이브레아에 도착합니다. 낮시간 동안 충실하게 고객들을 만날 수 있었지요. 일을 본뒤 저녁 늦게 다시 독일로 향하여 달리면 새벽 2시전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습니다. 왕복 1300km가 넘는 고된 출장이었어요.”

뿌린 만큼 거두는 게 세상의 섭리일까. 최 사장의 실적은 1985년 첫해 100만 달러에 불과했으나 1986년 500만 달러, 1987년 2500만 달러, 1988년 1억2000만 달러를 넘겼다. 해마다 무려 500% 이상의 판매 신장률을 보이는 ‘파죽지세(破竹之勢)’ 의 성과였다. 삼성 반도체 신화의 첫 장을 연 주인공이 된 셈이다.


#기동타격대 = 14년간의 ‘반도체 장사꾼’ 생활을 마친 그는 디스플레이, TV, 디지털미디어 등 새로운 분야를 떠맡으며 또 다른 신화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삼성전자의 기동타격대 역할을 한 셈이다.

“1998년 9월, 디스플레이사업부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해 1000만대를 넘지 못했던 연간 판매량을 2년반 만에 2000만대 이상으로 끌어올렸어요. 2001년, 고전을 면치 못하던 TV 사업까지 떠맡으면서 영상디스플레이 사업부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2003년, 정보통신부장관으로 발탁돼 삼성을 떠난 진대제 사장을 이어 디지털미디어사업을 맡았습니다.”

요즘 그는 TV 사업에 미쳐산다. 올해 업계 최초로 100억달러 어치 이상의 TV를 팔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디지털 기술이 가전산업을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디지털 르네상스’ 라고 부릅니다. 올해 TV 판매 대수 및 금액에서 또 하나의 기록을 낼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독일병정 = 삼성전자는 세계 33개국에 생산법인 15개, 판매법인 37개, 지점 25개를 두고 있다. 연구개발(R&D) 거점도 8개국에 11개소나 된다. 대부분 최 사장이 직간접으로 관할하는 곳들이다. 이들을 1년에 한번이라도 돌아보려면 없는 시간은 만들어야하고 있는 시간은 쪼개야 할 판이다. 게다가 적당히 넘어가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성격이다. 밥먹듯 자주가는 출장이지만 자로잰듯 정확하게 일정을 짜고, 칼같이 업무를 처리한다. 삼성전자 초년병 시절부터 보여준 최 사장의 그런 업무처리 스타일은 그에게 ‘독일병정’ 이라는 별명을 안겼다. 전형적인 최 사장의 남미 출장일정을 살펴보자.

“일요일 인천을 출발하면 같은 날 저녁에 뉴욕 도착, 주재원들과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습니다. 다음날 오전 사무실에서 업무보고 받고, 점심 먹은 뒤 상점들을 들러봅니다. 오후에 마이애미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마이애미 공항 도착 즉시 식당으로 직행합니다. 공항식당에서 마이애미 주재원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업무 보고받고, 새벽 1시 비행기에 탑승하지요. 새벽 4시반 브라질 마나우스에 도착합니다.

공항에 마중나온 법인장을 따라 호텔로 가서 샤워후 오전 7시에 아침을 먹지요. 오전 8시반부터 현지 공장 현황 보고 및 현장 시찰, 관계사 및 협력사 공장 방문 후 현지 간부들과 저녁을 먹습니다. 다음 날 아침 비행기로 4시간 반 걸리는 상파울루로 이동, 도착 후 사무실로 직행합니다. 업무 보고를 받은 뒤 상파울루 시장 방문, 주재원 및 현지인 간부들과 저녁식사 등의 일정이 이어집니다.

이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칠레 산티아고, 페루 리마, 콜롬비아 보고타 등에서 하루씩 묶으면서 비슷한 일정을 소화합니다. 멕시코 멕시코시티에 저녁에 도착해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아침 티후아나로 이동해 공장방문을 합니다. 그날 오후 차량을 이용,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로 옮겨 주재원 및 현지인 간부들과 저녁을 먹습니다. 밤 10시 LA 공항으로 이동해 다음날 0시50분 귀국편에 탑승하면 다음날 인천공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총 9박10일의 숨가쁜 일정이지요.”

이름하여 ‘GS(최지성 사장의 이니셜) 루트’ . 최 사장과 함께 출장을 갔던 직원들을 통한 입소문을 타고 사내에 알려진 이후 임원들의 남미 출장 표준일정표가 됐다.

최 사장은 이처럼 시도때도 없이 외국출장을 다니면서 시차를 어떻게 극복하는 걸까. 건강관리는 또 어떻게 하는 걸까.

“일을 즐기고, 일에 몸을 맡기면 건강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굳이 노하우를 이야기하자면 신체의 바이오리듬을 타는 거지요. 비행기나 차량으로 이동할 때 졸리면 자고 잠이 안오면 책을 읽습니다. 준비해간 책이 모자라면 비행기에 있는 모든 프린트물은 다 읽지요. 항공사 잡지들도 좋은 읽을거리 입니다. 현지에 도착하면 주재원들과 오래간만에 만나 딱딱한 업무 이야기만 할 수 없지요. 본사 이야기도 해주고 주재원들의 애환도 들어 주면서 한잔씩 주고 받다보면 거의 매일 취해서 호텔로 돌아오지요. 술이 수면제를 대신해 준 셈이겠지요.”

최 사장은 숱하게 미국과 브라질 출장을 다니면서도 나이애가라나 이과수 폭포 구경을 하지 못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한가하게 유람할 틈을 내지 못한 탓이다.

“나중에 퇴직한 다음에 뭐합니까. 그 때 아내랑 함께 다니려고 좋은 곳은 남겨두고 있습니다.”



#딸깍발이 = 서울고 시절 최 사장의 별명은 ‘딸깍발이’ 였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경우라면 선생님한테도 꼬박꼬박 따지고 들었기 때문이다. 1971년 서울대 무역학과에 들어갔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좋아하는 그의 눈에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 음모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교련반대를 외치며 거리에 나섰습니다. 지금 열린우리당의 원혜영, 이석현, 이목희 의원등이 당시 함께 데모를 하던 대학동기들입니다. 그 친구들에게 빚을 진 것 같아 경제 일선에서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사람의 성정(性情)은 크게 변하는 게 아닌가 보다. 최 사장은 지연이나 학연을 찾거나 세상을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아주 경계한다.

“삼성 입사전에 다른 대기업에 시험 본 적이 있었습니다. 면접 과정에서 학연과 지연을 따지는 것을 보고 포기한 뒤 삼성을 택했습니다. 지금도 이런 저런 연을 내세워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마이너스 점수를 줍니다.”

아래로 눈꼬리가 처져 한량없이 착해보이기만 하는 최 사장. 속은 참 무서운 사람이다.

하노버(독일)=parksangjoo@yahoo.co.kr
 
 
------------------------------------------------------------------------------
 
1000쪽 반도체 책 암기 ‘商大 전자공학과 출신’ 으로 불려

‘삼성전자 30년사’ 386쪽. 1994년 12월7일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 양산에 성공한 것을 기념해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김광호 전 회장, 이윤우 부회장, 진대제 전 사장, 황창규 사장, 권오현 사장, 이문용 부사장 등 어제와 오늘 삼성전자의 반도체 신화를 이룬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모두 기라성 같은 엔지니어 출신들이다. 이들 가운데 유독 비(非) 엔지니어 출신이 딱 한명 섞여 있다. 바로 당시 삼성전자 이사보였던 지금의 최지성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장이다.

최 사장은 서울대 상대 무역학과 출신이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최 사장은 ‘상경대학 전자공학과’ 출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반도체나 디지털미디어 분야에 관해 공대 출신의 박사급 엔지니어들과 당당하게 토론을 할 정도다.

“삼성전자는 수재급 이공계 인재들이 득실대는 곳입니다. 무역학과를 나온 저로서는 큰 핸디캡을 지녔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틈만나면 전자 관련 서적을 읽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제품을 고객들에게 사라고 할 수 없잖습니까.”

최 사장이 엔지니어로서의 진짜 ‘내공’ 을 쌓은 것은 바이어들에게 물건을 파는 현장에서 였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지사 1인 소장시절이었어요. 초창기 혼자서 반도체 영업맨과 엔지니어 역할을 모두 해야하는 시절이었습니다. 승용차에 샘플을 싣고 다니며 유럽 각지를 돌며 반도체를 팔았지요. 바이어들이 시시콜콜 제품에 대해 질문을 해 오는데 제대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반도체 공정 기술서적을 아예 통채로 암기하기 시작했어요. 1000쪽 짜리 반도체 D램 제조공정을 설명하는 책이었는데 딸딸 외우다보니까 저절로 제품을 이해할 수 있었고, 바이어들에게도 자신있게 우리 제품을 팔 수 있었지요.”

스스로 그런 체험을 했기 때문일까. 그는 신입직원을 선발하거나 업무를 맡길때 전공을 따지지 않는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습니다. 저의 경우 삼성물산 잡화과에서 신발, 가방, 이쑤시개, 장갑, 연필 등 안팔아본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콘돔까지 팔았습니다. 온갖 비즈니스를 하면서 기본을 익혔어요. 회사에 들어와 열심히 일을 하다보면 자연히 그 분야에 정통해진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끝임없는 호기심과 노력입니다. 부딪치는 사안마다 한 꺼풀씩 의문을 풀어가는 치열한 과정을 거치다 보면 전문가가 되는 거지요.”

춘천고를 다니다가 서울고로 옮기는 과정에서 고등학교 졸업이 1년 늦었다. 강제징집으로 갔다온 군복무 때문에 대학졸업도 1년뒤 처졌다. 동년배 친구들보다 사회진출이 2년이나 늦어진 셈.

“1~2년 늦는 것은 별 것 아닙니다. 인생은 결국 마라톤 아닙니까. 그렇다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지요. 특히 젊었을 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죄악입니다.”

부인 백은주(50)씨는 대학시절 캠퍼스커플로 만나 결혼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온 딸 은경(26)씨와 고려대 3학년에 재학중인 아들 서현(24)씨를 두었다.

박상주기자


▲1951년 2월 강원 강릉 출생 ▲1970년 2월 서울고 졸업 ▲1977년 8월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1977년 7월 삼성물산 입사 ▲1985년 3월 삼성반도체통신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무소장 ▲1993년 3월 삼성전자 이사보 ▲1995년 1월 삼성전자 메모리 영업이사 ▲1996년 1월 삼성전자 메모리 영업상무 ▲1997년 1월 삼성전자 반도체 판매사업부장 ▲1998년 1월 삼성전자 메모리 판매사업부장 전무 ▲1998년 9월 삼성전자 디스플레이 사업부장 ▲2000년 1월 삼성전자 디스플레이 사업부장 부사장 ▲2004년 1월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장(디자인센터장 겸직) ▲2005년 1월 영상 디스플레이 사업부장 겸직

기사 게재 일자 2006-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