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만남

신혼여행기록(新婚旅行記錄)

南塘 2021. 6. 27. 13:51

글 : 공학박사 이동한

 

 

신혼여행은 신혼부부가 결혼식 이후에 떠나는 여행이다. 필자가 결혼할 때만 해도 일생에 한번 뿐인 여행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두 번, 세 번을 가는 신혼여행이다. 영어로 Honeymoon이라고 하는데, 이를 한자어로 직역한 밀월(蜜月)이라는 단어도 있다이는 신혼부부가 1달 동안 꿀술 등의 꿀 음료를 마시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신혼의 첫 1달이 가장 달콤한 때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필자가 생각하는 신혼여행의 의미는 선남선녀가 일생동한 살아 갈 계획을 세우고 어떻게 잘 살 것인가의 꿈을 그리는 시간이다. 신혼여행은 단순한 휴가나 휴식차원의 의미는 아니다. 매우 중요한 여행이다. 1980년대는 신혼부부 단독여행 보다는 단체여행이 많았다. 신혼여행지는 온천도시가 인기가 있었다. 수안보, 온양, 부곡, 설악, 경주 정도였으며, 1980년 중후반부터는 제주도가 주 대상지 되기 시작했다. 필자는 1986년12월7일 결혼 했다. 당시회사에서 동료들의 축의금은 1,000원에서 3,000원 사이였다. 친족들의 축의금도 50,000원을 넘지 않았다. 혼인비용을 대처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많은 돈, 들이지 않고 결혼식 이튼 날 오후 늦게 동부고속버스를 이용해 속초로 출발했다.

 

신혼여행에 특별한 계획이 없었던 것은 경제적인 이유이다. 신혼여행은 가고 싶었다. 최소비용으로 최적의 여행 구상머리에 두고 출발했다. 숙소도 정하지 않았다. 당시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다. 여행사를 통해서 일정에 따라 예약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단순하게 3박4일의 여행계획은 1박2일 설악산, 2박2일은 7번 국도를 따라서 주요명승지를 돌아보고 통일전망대까지 올라가 보고 돌아오는 날은 강릉 오죽헌을 탐방하는 일정으로 정했다. 12월8일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속초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에는 우리부부 외에도 몇 쌍의 신혼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도착과 동시에 여행사의 안내를 받아 떠나고 우리부부는 지인이 소개한 숙박업소에 들었다. 너무 피곤해서 꿀 수면을 취하고 다음날 아침식사 후에 외설악 설악동으로 이동했다. 오전 10시쯤이었다. 설악산 국립공원 매표소 앞에는 어제 고속버스에서 보았던 신혼부부들이 모여 있다. 간단하게 눈인사를 했다. 마음이 통했을까 설악케이블카를 지나서 육담폭포와 비룡폭포를 다녀오는 길을 걸었다. 겨울이라 활엽수는 모두 가시나무가 되어있었으나 소나무의 푸름은 더할 것 없었다. 동행한 사진사가 없었다. 동서에게 빌린 카메라는 Minolta X300 모델로 당시로서는 고급제품이었다. 필름은 코닥 400 36exp를 사용했다. 사진기에는 필름이 들어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착각이 부른 참사가 시작되었다. 보통의 카메라들은 필름이 들어 있지 않으면 감김이 되지 않고 필름의 잔량표기가 작동하지 않는다. 빌린 Minolta 카메라는 감김 작동은 물론이고 사진을 찍을 때 마다 필름의 잔량표기가 36에서 0으로 디스플레이 되고 있었다. 동서가 우리를 위해서 필름을 넣어 둔 것으로 인식하고 열심히 추억을 넘겼다. 달달한 이미지와 사랑의 순간순간들을 소중하게 담아냈다. 신흥사로 가는 길에 필름을 갈아 넣기 위해서 뒤 커버(Cover)를 여는 순간 정신 나간 혼을 보았다. 필름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의문점은 카메라가 정상 작동 되었다는 것이 더 이상하다. 카메라를 탓할 수도 없었다. 신혼여행의 하이라이트 인증 샷이 없는 연유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필름을 넣고 살악동에서 몇 장의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저녁은 숙소 가까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신혼여행 3일차 되는 아침 버스를 이용해 대진에 도착했다. 해금강을 보러가기 위해서이다. 해금강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려고 확인해 보니 정보가 없다. 버스회사 직원에게 문의해 보았다. “아저씨 해금강으로 가는 버스는 없나요?” 아저씨 우리부부를 멍하니 쳐다본다. 표정은 기가 막힌다.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뜸 들여 돌아온 대답은 이렇다. 댁들 간첩이오, 해금강은 북한이요” 대답에 놀란 것은 우리부부이다. “예, 뭐요, 북한이라고요” 참으로 무지했다. 해금강이 휴전선 북쪽에 위치해 있는 것을 몰랐다. 허망했다. 당시에는 통일전망대가 없었다.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세 시간을 이동하여 강릉에 도착했다. 경포대 민박집에서 생선 회 한사라, 매운탕에 공기 밥으로 요기를 했다. 저녁에는 옥계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사촌 여동생 “명순”이 강릉으로 나와서 근사한 저녁식사를 대접 받았다. 사촌여동생 “명순”은 현재 미국 뉴저지 주에 살고 있다. 신혼여행 때 대접받은 저녁식사의 고마움이 남아서 기회가 있으면 무엇이든 보답을 하려고 한다. 일전에는 코로나19 방지를 위해서 방제기기와 약품을 보내기도 했다. 신혼여행 마지막 날이다. 오죽헌 탐방을 했다. 오죽헌은 신혼부부가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사백년 전 율곡이이와 신사임당의 기()를 받아 거출한 자녀를 생산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서이다. 깊어지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봄처럼 따뜻한 날이었다. 가끔 불어오는 소솔바람이 싫지 않은 정도였다. 대나무 부딪는 소소함의 소리가 있다. 몇 장의 사진을 남겼다. 필자의 신혼여행에 사진이 별로 없다. 신혼여행에서 들은 이야기는 덕담이 아닌 “댁들 간첩이요”이다. 그런 날이 있어 오늘이 있는 것이다.

 

신혼여행에서 택시한번을 타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유의하지 못해서 아내에게 미안했다. 평생 단 한 번의 여행을 모두가 누리는 화려함 없는 신혼여행의 미안했던 마음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우리부부는 매년 12월7일을 전후해서 제주도를 비롯한 유명지로 여행을 떠난다. 신혼여행은 아니지만 여행을 할 때마다 새롭다. 35년 전 신혼여행, 필름이 없는 카메라 앞에 어스름이 남아 있는 기억들이 있다. 비록 비용문제로 케이블카도 타지 못하고 부러워했던 그 모습들이 현재는 행복으로 각인된 한 컷, 한 컷의 사진이고 인생 이미지가 되었다. 2021.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