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라면
글 : 이동한
라면은 세대를 초월한 식품이다. 라면은 일본에서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탄생한 식품이다. 인스턴트식품 중에서 단연 으뜸으로 손꼽히는 것은 라면이다. 식품업계의 혁명으로까지 극찬 받았던 라면은 일본에서 시작됐다. 라면은 1958년 일본 닛신(日淸)식품의 회장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에 의해 개발되어 시판된 식품이다. 국내에서는 1963년 삼양라면이 일본의 라면 제조기술을 도입해 삼양라면(치킨탕면)을 선보이면서 라면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당시 일반인들에게 라면은 생소할 뿐이어서 초기 반응이 시큰둥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혼 분식 소비 권장정책에 힘입어 라면이 대중화되었다. 현재는 우리 일상에 빠질 수 없는 식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라면 소비량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최근 라면에 첨가된 MSG조미료, 지나치게 높은 염분, 열량 등이 알려지며 라면 섭취에 대한 걱정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우려를 반영하여 식품산업체에서는 나트륨 함량을 낮춘 제품들을 출시하고 있다. 세계인스턴트협회(WINA) 통계결과 2019년 라면 소비량은 54억 개이다. 세계1위 라면 소비국 한국은 일인당 연간 75개의 라면을 소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필자와 같은 베이비 부어 세대의 라면에 관한 체험사례는 넘쳐 날 것 같다. 1960년대 중 후반 가정마다 다산(多産)에 의한 가구마다평균 6명에서 12명까지 가족구성원이 되었다. 당시에는 식량난으로 미국으로부터 쌀, 밀가루, 옥수수 등의 많은 양의 원조가 있던 때이다. 번번한 사업시설이 없이 농업에 의존하던 한국경제로는 굶주림을 극복할 전략이나 방법도 없던 때이다. 농사가 없는 가정은 보릿고개 이상의 고통을 겪었다. 필자의 집도 다르지 않았다. 쌀밥은 일주일에 한번, 보리밥은 삼일정도, 배급 받은 밀가루로 수재비와 국수를 밀어서 끼니를 해결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어쩌다 일원짜리 한 장 생기면 풀빵(지금의 국화빵과 붕어빵)을 사먹고 했다. 라면을 먹는 날은 어떤 날인가? 손님이 오시면 라면을 먹는 날이다. 손님에게 대접할 것이 마땅치 않았다. 없는 살림에 생색을 내기도 좋고 많은 반찬 없이 대접이 가능한 식사대용이었기 때문이다. 손님에게 대접하고 남은 라면국물에 소면을 넣고 한 솥 끓여서 여섯 식구가 머를 맞대고 수식 간에 먹어치우던 기억이 있다. 가끔은 아침식사도 하지 못하고 등교하여 늦은 오후에 귀가하여 찬장을 열러 보면 퉁퉁 부른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기억도 있다. 아침 땟거리가 마땅치 않을 경우 라면과 국수를 혼합해서 아침대용으로 먹던 기억이 있다. 필자가 성장하여 고등학교 일학년 때인 1975년의 일이다. 시골에서 유학을 와서 자취를 하던 동급생 친구가 있었다. 본가는 봉양면 마곡리이다. 통학이 버스가 하루에 한번 있어 통학이 어려워 동네에서 자취를 했다. 1970년대 중반 제천으로 유학을 올 정도면 가정형편이 좋은 것이다. 제천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동급생 중 30% 정도는 강릉, 태백, 정선, 영월, 단양, 풍기, 영주와 제천의 면단위에서 유학을 했다. 이들은 매주 토요일에는 본댁에 갔다가 일요일 오후에 1주 혹은 2주의 식량과 생활비를 받아서 자취방으로 돌아온다. 필자의 동네에서 제천고등학교는 1.5㎞, 제천여자고등학교는 700m 정도이며 제천역이 가까워 자취하기에는 최적의 동네이다. 그런 연유로 자취하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몇몇이 있었다. 그중에 “석대 아버지” 집에서 자취를 하던 “김영중”은 고등학교 한 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한 급우이다. 기골이 장대한 그런 친구이다. 성격까지도 호탕하다. 2주에 한번 본집에 다여 오면 쌀과 밑반찬을 챙겨서 온다. 그리고 반드시 따라 오는 것은 3000원에서 5천원의 생활비이다. 상당히 큰돈이다. 당시의 버스요금은 100원이었다. 라면의 가격은 1963년 10원이었다. 197년에 50원이었다. 그리고 자취생들에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소주이다. 1975년 판매되던 소주는 진로의2홉(360ml), 4홉(640ml), 대병(1.8ℓ)이며 2홉의 가격은 75원에서 80원, 4홉의 가격은 100원에서 120원 정도였을 것이다. 일요일 저녁이면 본댁에 다녀온 자취생 “김영중”은 어김없이 필자를 부른다. 양은 냄비에 라면 두 개와 시골서 가져 온 자연산 계란과 대파를 넣고 끓여 낸다. 그리고 빠지지 않는 4홉 소주 2병이 있다. 각자 1병이다. 냄비 뚜껑에 꼬들꼬들한 라면을 올려서 먹고 소주한잔 떨어 넣는다. 그리고 라면 국물을 한 숟가락 먹으면 카! 죽인다. 60초 백열전구 아래서 밤을 새워 철학과 문학을 논한다. 돌을 먹어도 소화가 한참 나이에 라면과 소주는 매번 부족하다. 연탄불에 라면 두 개를 더 끓여 내고 소주는 두꺼비 두 살로 변경한다. 1975년 많은 시간을 친구와 소주와 라면과 같이 했다. 세월이 흘러 군에 입대를 했다. 26사단 신병교육대 내무반은 난방을 위해서 빼치카가 있었다. 혹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빼치카표 라면을 드셔 본 분들 많을 것이다. 필자는 운이 좋아 조교들에게 빼치카 라면을 종종 얻어 먹었다. 조교들이 라면을 나누어 주기 전에 반드시 “어머니 은혜”를 부르게 했다. 눈물 젖은 라면이었다. 훈련소 근무를 마치고 동두천 기갑여단 사령부에 배속되었다. 사령부 본부대의 행정병이라 군복무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행정병이라도 매복근무는 피할 수가 없었다. 매복근무는 일몰이 되면 분대단위로 출발하여 부대인근 산지에 설치된 토치카 진지에서 근무하게 된다. 매복근무는 분대 9명 단위로 근무를 하게 된다. 출발 전 4명의 수통에 소주를 담아 둔다. 4명의 수통에는 물을 담는다. 그리고 모기약 8개정도를 챙기고 라면은 인당 1개씩 조달을 받아서 매복근무에 나선다. 진지에 도착하면 졸병들은 모기약을 이용해서 라면을 끓여 선임자 순서대로 소주를 겸한 라면을 먹는다. 일반인들이 보면 군기 빠졌다고 탄식할 일이만 추운겨울 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방한복이 부족했던 때의 군 생활에서 일부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추억이다. 그렇게 무장공비 침투길목을 밤새워 지키고 일출 전에 부대로 복귀했다. 그리고 전방GOP(General out post) 1개월 정도 지원근무를 한 경험이 있다. 연천과 철원 사이었을 것이다. 겨울 혹한기라서 추위는 매서웠다. 겹겹이 입은 옷으로 거동이 불편했다. 북한과 철책을 사이에 두고 총을 겨두고 있는 살벌한 곳이다. 야간경계근무는 밀어 내기 방식이다. 그러나 추운고통은 근무를 마치고 내무반에 들어오면 기다라는 따뜻한 라면이 있어 큰 위로를 받던 기억이 있다. 군에서의 라면에 관한 기억과 추억은 많다. 이처럼 라면은 필자의 일생과 함께 해 온 식품이다. 시대를 거듭하면서 라면의 품질도 매우 좋아졌다. 지금도 가끔은 라면을 먹고 있지만 즐겨서 먹는 편은 아니다.
2021년 봄이다. 새삼 라면에 관하여 몇 일전부터 생각이 많았다. 그 시절의 추억과 아픔을 함께 해온 라면은 인류에 있어 위대한 발명품이다. 처음 시작된 일본보다 한국에서 꽃을 피우고 경제성정에 바탕이 된 라면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필자는 일본차는 절대 타지 않는다. 대부분이 전범기업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라면은 다르다 일본에서 시작된 라면은 한국화에 성공하였으며 기호식품에서 가장 선호하는 식품이 되었다. 무엇이든 한국인의 혼을 넣어 한국화하는 것이 경쟁력이다. 라면은 한국인의 밥상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다.
2021. 3. 22
발명상식사전, 2012. 1. 10., 왕연중)에서 일부 참조
일반전초. 남방한계선 철책선에서 24시간 경계근무를 하며 적의 기습에 대비하는 소대단위 초소. 군사분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서 비무장지대(DMZ)를 관측하는 GP(guard post·경계초소)와 구분된다. 적의 동태를 감시할 수 있는 관망대와 경계초소, 대기초소, 소초(생활관) 등으로 이뤄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