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분과의 인연, 행복을 이야기 하면서
아름다운 세분과의 인연, 행복을 이야기 하면서
흔히들 하는 말이 “인생 뮈 있어?”, 그런데 인생은 무엇이 있다. 많은 이야기와 사연 그리고 좌절, 시련극복, 성공과 사랑에서 이런 저런 삶에서 나에 고맙고 감사한 많은 분들 중, 세분에 관하여 이야기를 얶어 보았다.
사람은 인연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세상을 살아 가면서 이름 세자도 남기기 못하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인연은 정말 중요하다. 인연은 인생 행복을 결정하는 핵심 인자이다. 오늘 이글에서 60년을 살아 오면서 선배와 친구와 후배를 아울려 고마운 분, 잊지 못하는 분, 아름다운 분, 남은 여생도 같이해알 고마운 분들에 관하여 이야기 해 본다.
나의 고향은 충북 제천이다. 의병의 고장, 청풍명월의 고장이다. 도시는 소백산맥과 차령산맥에 남한강을 품은 평균 해발 300미터의 천혜의 요세라도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알려 지지 않은 또 다른 10승지 를 가지고 있는 제천은 민초들에 삶에 애환이 담긴 농촌도시이다.
진성이씨(眞城李氏) 22세손에 정승판서가 나온다는 경북 예천군 용문면 소백산 내 내연산 매봉(816m) 배산으로 금곡천을 입수로 명당터라는 상리에서 태어났다. 성장은 충북 제천시 영천동에서 21세까지 성장을 하였다. 그리고 효원의 고장 수원(水原)으로 이주하여 40년을 살았다. 사람에 만남은 살아 가는 삶에 태두리에서 결정되는 예가 많음으로 나도 그 경우를 벗어 날 수 없다. 나는 인성이 악(惡)한 부분은 없다. 인성은 선(善)하고 정(情)이 많다. 그리고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왕왕 있으나 마음이 여러 주변에 안된 사람을 보면 지나치니 못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어 과유불급에 균형이 자주 무너지는 어리석은 모습도 보인다. 그런 내게 소중한 세분은 인생에 있어 등대와 나침판이 되어 준 부분이 너무나 많다. 그 고마움을 이글로 전해 드리고 싶다.
사람이 온화하고 청백리와 같은 “김주완 선생님”은 1년 선배로 존경스런 인물이다. 노래와 피아노 연주, 바둑을 좋아 하는 분이다. 법원 공직 40년에 말단 주사보에서 과장까지 승진하였고 지금은 사법연수원과 법원공무원 교육원에서 후배 법관과 공무원 교육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분은 내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제천 도서관에서 검정고시와 사법고시를 준비할 때 인연을 맺게 되었다. 너무도 많은 추억과 정(情)을 나눈 분이다. 내 평생 잊지 못하는 고맙고 감사한 분, 고독하고 외로운 독학과 고시공부에서 쌓은 정(情)은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분도 넉넉한 가정은 아이였다. 홀 어버님을 모시고 둔전골 끝자락 집에서 선비와 같은 생활을 할 때, 없는 살림에 백색 고무신 한컬래며 식사와 시련이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귀한 담금 술과 집에서 키우는 닭과 토끼를 아낌없이 내주면서 내게 너무나 많은 것을 배풀었다. 우린 서로 존대를 했다. 지금도 그렇다. 제천서 야학을 같이 했다. 약 250명 이상이 야학 을 걸처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그 때도 따스한 마음을 실천하는 사려 깊음이 바다와 같던 분이다. 사회에 진출하여 나의 삶이 고단하다 보니 가끔은 그분에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IMF, 금융위기, 정년퇴직을 남겨둔 어느 날에 온 전화에서도 나는 평정심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응대를 못했던 그런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공무원에서 청백리에 표상이다. 법원공무원 생활 10년 이상이 된 어느 날 댁을 방문한적이 있다. 모두 LCD TV를 사용하는데 이집은 로터리 채벌의 CRT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새 TV를 권유 해 보았지만 허탕이였다. 근면, 겸손, 검소한 마음과 업무에서의 공과 사를 명확히 처리하는 자세도 현 시대를 살아 가는데 있어 존경 받아야 할 분이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사법부와 관련된 기념일에 이런 분을 발굴하지 않는 이유가가 무엇일까 ?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 가면강남 수담 한정식에모셔 지나간43년의 회포를 플어 보고 싶다.
나는 낯가림이 심하지는 않지만 성장한 환경 탓인지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사교성이 아주 높은 지수에 사람은 아니다. 많은 사람을 쉽게 사귀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번 인연을 맺으면 내가 손해 보더라도 내가 인연을 먼저 끊는 예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순수한 글과 시(詩) 검소한 생활, 변화하지 않는 생각과 삶을 가진 “권기환 선생님”은 고등학교 1학년 짝궁이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예수님과 동격이신 아버님 아래서 3남2여 중 3남으로 성장한 친구는 교동고개, 제천향교 아래 동네에 살고 있었다. 나를 만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짝궁으로 만나 45년 세월을 친구로 이어온 삶에 인연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급우들을 선동해서 과수원 설리 등등 일탈로 유급정학을 맞은 기록이 있다. 이때 친구 집에서 1주일을 기거하면서 반성문을 매일 제출하였다. 친구의 선비(先妣)께서는 너무나 좋은 분이였다. 정학을 맞은 친구 아들놈을 식사와 간식을 따스하게 챙겨 주셨다. 친구는 문학(詩)를 좋아 했다. 같이 시(詩)를 쓰고 그리스의 철학을 이야기 했다. 시간이 되면 의림지(義林池)올 올라 막거리 한사발 한면서 나는 리어리즘에 모더니즘을 친구는 낭만주의 경향에 철학과 문학을 이야기 했던 사이다. 내가 군(軍)에서 전역하고 제천 유지와 정가의 손짓을 뿌리치고 친구에 권유로 삼성전자 일반직 Ⅱ 로 1984년 입사를 했다. 입사 前 우리집은 완전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선친(先親)은 폐인처럼 살으셨고 선비(先妣)께서는 뇌졸증(중풍)으로 경제 활동은 전무한 상황에서 동생들은 중학교 1학년, 2학년,3학년 재학중이라 등록금도 내지 못해 퇴학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군입대 전에 지역사회에서 사회적 역할을 했던 나는 유신기업 대표, 중앙시장 번영회 회장(장인기 회장)님에 도움으로 전역전까지 동생들에 등록금을 지원 받았다. 그리고 친구도 삼성전자에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동생들에 등록금을 흔쾌이 내 주기도 했다. 친구는 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 갈때 안타까운 조언과 따스한 마음을 전해 주었다. 삼성전자에 입사하여 갈곳 없는 나를 자신에 자취방에서 아무런 댓가 없이 3년간이나 거소하게 해 주었다. 나의 가정 형편이 너무나 어려워서 극복 자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친구에 배려는 나를 더욱 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버팀목이였다. 2008년 금융위기 때, 구조조정 대상이 된 친구를 명퇴 할 수는 없는 노룻이라 평생 호구에 걱정이 없도록 Monitor Repair 업무를 아웃소싱 (outsourcing)하여 퇴직 할 수 있도록 했다. 관리자인 나로서는 최선에 방법이 였다. 친구는 지금까지도 Repair Work을 통해 생업을 이어가 고 있다. 얼마전 입북동 초가집에서 부부동반 식사를 했다. 나는 내인생에 고마움을 표 했다. 그리고 이제 부터는 베프는 삶과 겸손한 행복을 약속했다. 웃으면서 세상을 살면서도 말 못할 사연 숨기고 살아온 세월 이제 친구와 언제한번 가슴을 열고 큰소리로 울고 웃어 보고 싶다. 그리고 못다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막걸리 한잔에 변하지 않는 정(情)을 부어 넘치게 하고 싶다. 내 성공의 속도를 언제나 충고하며 초심을 잃지 않게 말해 준 친구, 나에 영원 한 고등학교 짝궁 “권기환 선생”은 영생에 친구이다. 현재의 내가 (명장, 박사, 교수, 부사장, 사업단체 회장, 시인)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친구에 덕이 90%이다. 나의 노력은 10%이다.
나는 강직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내가 삼성에서 31년의 생활에서 인적무적(仁者無敵)을 실천하는 후배 “이민석 프로님”과 형제와 같이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는 수원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독실한 기독교 교인 부인과 심성고운 두명에 딸이 있다. 우리가 만난 것은 1998년경 법무부 법죄예방활동을 하면서다. 활동을 하면서 그에 인품에 매료 되었다. 넓은 도량과 이해심, 어려움 가운데도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자세, 그리고 아타까운 사연을 보면 도와주려는 모습, 가령 구조조정 당한 사우들을 적극 추천해서 각자 호구에 이상이 없도록 해주는 것은 결코 요즘시대에 쉽지 않은 것이다. 또 경조사는 하나도 빼 놓지 않고 참석하거나 챙기는 친구이다. 나는 가슴에 따스함으로 “이민석 집사”를 존경하고 좋아하고 형제와 같이 지낸다. 우리는 경제적 나눔 보다는 마음 나눔을 먼저 실행하는 부분이 많다. 2010년 나는 회사에서 모함을 받아 매우 어려움에 처해지게 되었다. 당시에 “이민석프로”는 인사부서와 선전포고를 주고 받는 나를 대리한 전쟁을 치룬적이 있다. 삼성이란 조직에 병은 최우수, 초단위 경쟁력을 내세우고 있지만 조직 내에서는 시기와 질투 그리고 무고에 가까운 투서로 인해 조직에 해가 되고 우수한 인재가 회사를 떠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종종 일어 난다. 그러나 “이민석프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격이 없는 배려와 정을 베츨고 타인을 최대한 이해하려 한다. 나에게도 동일하다. 나는 “이민석프로”는 내형제와 같다. 무엇이든 같이하고 싶다. 우리에 인연은 아름답기 위헤서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맺어진 것이다. 지속적으로 나는 “이민석 프로”와 콩개라도 같이 나누어 먹고 아픔을 나누고 기쁨을 축하하면서 살아 갈 것이다. 이처럼 기쁘고 아름다운 일이 더 있을 까 ?
2019년2월 나는 한국으로 일시귀국을 결정 했다. 한국에 한 대학에서 교수 초빙이 있고, LA생활에서 건강이 나빠져 치료가 불가피한 상황이라 일시 귀국은 해야 한다. 그러나 아들에 장려를 위해서는 미국에 영주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 아들이 대학원을 졸업후에 기회의 땅에 와서 자신에 꿈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디딤돌은 되어야 하지 않을 까 ?
사람이 인연을 맺고 유지하고 같이하는 것은 금전에 유불리를 반드시 떠나야 한다. 각자도생에 사회에서 시사되는 인간미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 Value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을 이야기 해 보고 싶다. 나는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바꾸어 볼 거다.
2019. 2. 18
California Carson ABSC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