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할베 종가 가는길 (4) 이육사 문학관
8월14일 아침 종손과의 대화를 마치고, 한서암으로 돌아와 짐을 챙겨 든다. 아침 10시 이육사 문학관을 향한다. 토계천(종택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흐르는 천(川)을 따라 1km 좌측으로 왕모산 자락에 퇴계 할베 묘소가 있고 고개를 넘어 우측에 한국근대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이육사(李陸史)1904년 5월 18일 - 1944년 1월 16일는 한국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이원록(李源祿) 또는 이원삼(李源三)이다..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진보)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나보다 한 학렬이 위인 어른이시다. 이육사란 이름은 1932년 의열단(義烈團)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제1기생 입학 명단에 육사(陸史)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죽일 육(戮) , 역사 사(史) 육사(戮史)라는 이름을, 바로 이어서 고기 육(肉) 설사할 사(瀉)를 사용했다. 집안 아저씨인 이영우가 " 육사(戮史)는 역사를 죽인다는 표현이니,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말 아닌가? 의미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차라리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표현이 되는 '陸史'를 쓰는게 좋겠다"고 권했다. 陸 (높고 평평한산의 꼭대기)하여 사용하게 된 이름이다. 8월 15일 MBC에서 방영된 내용 중 부인에 의하여 이름이 고쳐진 것이 아님을 밝혀 둔다. 육사 문학관은 지상2층의 단아한 현대식 건물이다. 2층은 영상을 통해 시인의 생애를 학습할 수 있으며 한국 유명 시인(윤동주, 박목월, 박두진....)들의 친필 편지와 시가 전시되어 있다. 1층에는 시인의 유품과 작품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시인들은 정말 글씨를 잘 쓰는 것 같다. 필체들이 아름답고 정갈하고 맥이 있다. 이런 말에 딸 아이 아빠도 글씨 쓰는 것은 시인들과 똑 같다고 물론 이름없는 시인이지만, 하지만 문인의 자손이라 그런 것일 수 있다.
이육사의 시는 현대의 기계주의 적 비인간화에 반발하여 인간의 생명 자체를 추구한다. 그의 시는 끝없는 방랑에서의 회상(향수)과 초극 의지에서 비롯된 기다림의 양극에서 분비되는 인간적 고통과 어려움을 시로 형상화함으로써 시대적 상황 속에서의 개인적 서정의 심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육사시의 본도(本道)가 생명 적인 것의 추구에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예술성의 심화에 대한 육사의 끈질긴 집념을 볼 수 있다.
그의 시가 엄격한 행(行)과 연(連) 구성의 성형 의식과 가락을 견지하고 있는 것은 육사의 시 의식이 고전적인 선비 의식과 한시의 영향, 그리고 유교적 엄숙성에 정신적 혈맥을 두고 있음을 뜻한다. 신시사(新詩史)에 있어 대부분의 시가 센티멘털리즘에 감염된 여성적 체질을 갖고 있음에 비추어, 육사의 시가 여성적 감수성에 대륙적 기상과 남성적 의지를 불어넣음으로써 한국 시가 튼튼한 체질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에 의하면 시는 행동이며 진정한 의미의 참여라고 한다. 그는 식민지적 압력에 대항하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대륙을 전전하며 숱한 고난과 역경을 체험하였다. 이러한 역경과 인고의 극복노력은 기다림의 철학과 초인 의지로 승화된다. 온 몸을 내 던진 헌신적 투쟁의 수형(受刑)의식으로 일제에 저항하여 , 그러한 인고와 생명의 절정에서 끝없는 기다림과 초인(超人)에 대한 열망을 시로써 형상화함으로써 보다 진정한 저항 방식을 보여 준 것이다. "육사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의 40평생 마지막 10년 동안이었고 그의 나이 서른이 되여서였다. 그 때 이미 그는 옥고를 치룬 바 있는 독립 투사요, 일경(日警)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 -김종길 [육사의 시] 나라사랑16집 에서- 이육사는 행동하는 시인 이였다.
그의 마지막 길은 1943년 7월에 그는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 고향마을인 원촌과 안동풍산에서 일박하고 상경한 뒤, 늦가을에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된다. 부인 안일양은 7월에 동대문 경찰서에서 마지막으로 육사를 보았다고 전한다. 20여일동안 구금생활을 치르다가 "딸 옥비에게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딸의 볼을 얼굴에 대고, 손을 꼭 쥐고는 '아빠 갔다 오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20여일 후 베이징으로 끌려갔다. 육사의 마지막 길이었다. 육사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육사와 같은 마을 출신이자 독립운동 활동을 하던 친척 이병희(여)가 육사의 마지막을 정확하게 증언해 주었다. 육사가 사망했으니 시신을 인수해가라는 연락을 듣고 이병희는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으로 가서 관을 인수하고, 급히 빌린 돈으로 화장을 치렀다. 그 유골이 든 상자를 이귀례라는 친구집에 두었다. 순국 후 9일 지나 1944년 1월 25일에 원창에게 넘겨졌다. 유해는 국내로 옮겨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그의 고향마을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이와 같이 문학관에서 많은 자료와 만날 수 있었다. 이육사 시인의 대표시 한수 적어 본다.
말
흣트러진 갈기
후주군한 눈
밤송이 가튼 털
오! 먼길에 지친 말
채죽에 지친 말이여!
수굿한 목통
축-처진 꼬리
서리에 번적이는 네굽
오! 구름을 헷치려는 말
새해에 소리칠 힌말이여!
< 출전 : 『朝鮮日報』(1930. 1. 3) >
육사의 여섯형제가 태어나고 자랐던 원촌리 집 -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사라지고 없다
그 집터 자리에 청포도 시비가 쓸쓸히 추모객을 맞고 있다
오늘 아침 종손과의 대회에서도 강한 것은 부러진다는 강하면 안되고 유(柔)해야 한다, 이는 한평생을 강한것과 부딪처 깨지고 썩게 되지만 혀는 무르지만 죽는 날까지 상하지 않는다. 우리 집안의 정신일 수 있다는 것이다. 活 어른이야 말로 암울한 시대를 극복하고자 문학과 투쟁을 겸비한 진실된 선비의 모습일 수 있을 것이다. 안동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 1,000이상을 배출한 고장이다. 이는 선비정신에 근거한 조국과 미중에 대한 진심의 사랑을 실천하는 정신 유산이 높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시간 정도 이육사 문학관을 관람하고, 영주 부석사로 향한다. 우리나라 강산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소박함과 단아한 마을들 그리고 정겨운 나무와 내 그리고 이를 어울리게 하는 산과 하늘, 여기에 이른 가을 바람까지, 봉화를 지나 부석사 가는길에는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의 생가가 있었다. 비롯 들리지는 못했지만 구전된 소설과 창소리인데 실재 인물이라고 하니 만감이 교차 한다. 약 1시간을 달려 소백산 선달봉 봉황산 아래 부석사에 도착했다. 이미 부석사는 수없이 소개된 글이 있어 중요한 단어만 적어 본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화엄사 석등에 이어 정교함이 묻어나는 석등 그리고 의사대상와 관련되 설화 선묘낭자의 이야기 등이 있다. 관람객이 넘무 많아 더위를 뒤로 두고 제천을 향한다. 남제천 IC를 통해 금성 청풍 한우집에 들려 점심을 먹고 신교수님과 이이사님께 추석 선물을 겸하여 선물세트를 구입하여 택배를 요청한 후 제천 송학 왕박제(王朴齊)로 돌아와서 그제 심은 배추의 상태를 살펴보고 고추와 각종 채소류를 수학하여 제천을 떠난 것이 저녁 20시 많은 박달재를 넘자 많은 비가 온다. 고속도로는 정체, 정체,,, 수원에 도착하니 22시30분... 이번 휴가를 정리한다
이번 휴가기간 아이들이 자손으로서 긍지와 자신에게 스스로의 비젼을 만들었으면 하는 기대 뿐이다.
2011. 8.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