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만남

퇴계 할베 종가 가는길 (2) 도산서원, 퇴계종가, 도산선비문화교육원

南塘 2011. 8. 16. 10:32

1부에서 받아서...

8/13일(토) 오후 17:30분을 넘긴시간 도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10년전에 방문 했을 때는 매우 한적 했는데. 많은 사람들로 분빈다. 입장권을 발매 받아서 내집에 들어 가는 기분이 매우 묘하다. 한국정신문화의성지 "도산서원" 우리 眞性家의 크신별이다. 진성가는 진보(지금의 청송군 진보면이다) 진성이씨는 이석(李碩)을 시조로 한다. 성을 본관으로 삼은 것은 선조들이 대대로 진보현(현 진성)에 살았기 때문이다. 진성이씨의 조상들은 이 고을의 아전(고려시대의 아전은 높은 관직임.)이었다고 한다. 대대로 아전직을 이어오다가 고려말 이석이 학문에 뜻을 세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해 가문을 새출발시켰다. 그의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충숙왕(忠肅王) 때 명서업(明書業, 글씨 잘 쓰는 사람을 뽑는 과거)에 급제, 나중 홍건적토벌에 공을 세우고 안사공신(安社功臣)으로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해지며 벼슬이 판전의사사에 올라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진성이씨에 대한 세본은 차후 논하기로 하겠다. 300m의 길지 않은 숲속 정원길, 안동호를 곁으로 호적하게 낭만을 노래하며 걸어 본다. 아들과 딸, 그리고 내자까지 우리가족이 선조의 숨결을 찾아서 정겹게 걸어 본다. 길지 않은 이동시간, 도산사원 앞 마당에 도착한다.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도산서원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호)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도산서원은 주교육시설을 중심으로 배향공간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서로 나누어진 광명실(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이다. 도산서원동편 도산서당건물을 ‘박약재(博約齋)’와 서편 건물을 ‘홍의재(弘毅齋)’라 하는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중앙의 전교당은 강학공간과 원장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재 뒤편으로는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자리하고 있다.

배향공간인 사당 건축물로는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尙德祠)와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이 있는데 삼문을 경계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부속건물로는 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으며 이는 홍의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 입구 왼쪽에는 1970년 설립된 유물전시관 ‘옥진각(玉振閣)’이 있는데, 퇴계선생이 직접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필 324.945㎡이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증축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 되었다.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관리운영조례를 제정 공포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출처 도산서원 홈페이지) 가장 정겹게 느껴지는 장소는 도산서당이다. 오늘 묶게될 한서암과 동일한 구조라 더욱 친근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서당 앞마당에 있는 정우당(淨友塘)은 연꽃이 가득한 정방형의 연못이다. 천원지방의 의미로 양진암은 원당을 조성하여 선천을 표상하였다. 서당에는 방당을 조성하여 후진양성과 인간관계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연못의 남쪽 앞부분은 당장이 세워져 있지 않은데, 연못을  통해 비취지는 산의 그림자를 즐기고자 의도 한 것이다. 이 연못 속의 산 그림자는 도산잡영 18수 중 하나이다. 퇴계할베께서 서당 아랴쪽의 좋은 경관과 돌, 나무 등 자연물에 이름을 붙이고 아름다움을 직접 노래 했는데 도산잡영이란 그 18개의 장소와 자연물을 가리킨다. 이 연못에느 연꽃을 피우는데 연꼿은 물을 맑게 정화하고 자신의 몸속을 비우고, 화려한 꽃일 피우게 된다. 선비는 무릇이와 같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뿌리인 진성 이씨의 사상과 철학은 무었일까 ? 시간이 지나서일까 ? 해는 이미 서산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 도산면 토계리 퇴계종택으로 갔다,  

 

 

 

퇴계종택 문화재 사진

 

(퇴계종택 현재는 16대 종손 이근필 웅이 홀로 집을 지키고 있음)

퇴계할베 종택은 원래 있던 집은 없어지고 이 건물은 1926∼1929년 사이에 선생의 13대손 하정 공이 옛 가옥의 규모를 따라 새로 지었다. 앞면 6칸·옆면 5칸 규모의 ㅁ자형 집으로 총 34칸으로 이루어졌다. 높은 석축 위에 둥근 기둥과 네모난 기둥을 사용하여 지었으며, 전면에 솟을대문을 갖추었다. 오른쪽에 있는 ‘추월한수정’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정자인데 마루에는 ‘도학연원방’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지금은 퇴계 이황의 16대 손인 이근필(80)웅은 금년 4월 아버지(이동은)의 3년상을 마친 뒤 퇴계 선생과 4대 조상에게 차례로 새 종손이 되었음을 알리는 제사를 올렸다. 아버지 신위는 사당으로 새로 들어가고 5대조 신위는 땅에 묻혔다. 고조부까지 4대만 사당에 신위를 두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은 4대를 벗어나지만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른바 불천위(不遷位)로 지정돼 위패가 지금도 종택의 별도 사당에 모셔져 있다  집례를 한 이동수(60)씨는 “길사에서 후손은 가통을 새로 잇고 조상은 축복을 내린다”며 “그래서 이 제사만큼은 ‘좋다’는 뜻의 ‘길(吉)’자를 붙인다”고 말했다. 종택에는 이날 후손과 유림 등 1200여 명이 모여 16대 새 종손의 탄생을 반겼다. (종손과의 대화는 "3년에서 다룰 예정 이다)  오늘 묶을 한서암은 퇴계할베께서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계상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머문 이듬해인 1551년 지어진 작은 건물이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지을 때까지 이곳에서 10여 년 간 제자들을 가르치고 『주자서절요』등을 집필했다. 23세 율곡 이이는 이곳을 찾아와 사흘을 머물며 가르침을 청했다. 율곡은 경북 성주목사로 있던 장인을 만난 뒤 강릉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동향의 선배였던 농암 이현보도 이곳을 방문했다. 뜻깊고 유서깊은 선조의 집에서 우리가족이 묶을 수 있는 것은 행운이하고 할 수 밖에 없다.

 

 

 

 

 

 

 저는 져서 사방은 어둡고 고요만이 남은 시간이다. 한서암 마루에 가족이 모여 앉아서 오늘을 이야기한다. 앞 마당 담넘어로는 매화 나무가 푸른 빛을 더해 가는 계절에 앞 또랑을 흐르는 많은 물소리는 정겹게 들리기도 한다. 저녁 19:30분 종택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위치에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저녁식사로 안동 찜닭으로 포식을 한다. .... 늦은 밤 비는 오고, 산속에서 들려오는 동물들의 울음소리 정막은 나의 뜨거운 가슴을 짙누려 바람에 일어 가는 솔잎 춤추는 현악으로 다가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