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을 찾아서 (88회)
1.행사진행 계획 시간
08:00-10:00 제천이동 및 의림지 도착
10:00-11:00 의림지 탐방
11:00-11:30 이동 제천 장락사지(버스에서 내려 많이 걸어야 하는데
이점은 한번 고려 해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11:30~12:30 장락사지 모전 석탑관람
12:30~13:00 이동 청풍문화재 단지관람
13:00~14:00 중식
14:00~15:00 문화재 단지 답사
15:00~16:30 이동 및 배론 성지관람
16:30 제천출발
18:00 수원도착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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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역사개관(歷史槪觀)
「제천시(堤川市) 개요」
충청북도 북동부에 있는 시. 면적 880.49㎢, 인구 14만 5,278명(1991). 시청 소재지는 청전동이며, 13개동과 8개면을 관할한다. 1914년 제천면, 40년 제천읍, 80년에 제천시가 되었다. 95년 1월 시· 군 통폐합 조치에 따라 제천군을 통합하여 시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산업별 인구구성으로 보면 3차산업이 70.3%로서 소비성향이 두드러진 서비스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석회석· 규석 등의 광물이 풍부하여 시멘트공장이 많으며, 태백권에서 산출되는 광물자원의 공급기능을 맡고 있다. 특히 형석의 생산은 전국에서 제일이다. 시의 외곽지역에서는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며 가축사육· 양봉업· 약초 등도 생산되고 있다. 태백권의 관문인 제천시는 중앙선· 정선선· 함백선· 충북선의 교점으로 교통의 중심지이다. 관광지로는 의림지(義林池)· 한벽루(寒碧樓)· 백련사(白蓮寺) 등이 있다.
개 관 : 충청북도 동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단양군, 서쪽은 중원군, 남쪽은 경상
북도 문경시, 북쪽은 강원도 영월군.원주시에 접하고 있다. 전체 면적이 882.2
3㎢이며 총인구가 147,090명(96. 12. 31기준) 이르고 전체 가구는 42,878가
구이며 행정구역은 1읍 7면 13동으로 시청 소재지는 천남동12-1번지이다.
자연환경 : 동부 단양군과의 경계에 작성산.금수산 등이 솟아 있고, 남부 경상북도와의
경계에 소백산맥의 문수봉.월악산.하설산 등이 있다. 북부 강원도와의 경계에
는 동북에서 남서방향으로 차령산맥이 뻗어나 가면서 백운산.송학산 등이 병풍
처럼 둘러싸고 있다. 하천은 남한강이 동부의 단양에서 유입하여 시의 중앙부
를 동서로 관류하면서 여러 지류를 합쳐 충주시로 빠져나가며, 충주 다목적댐
이 완공되면서 남한강 줄기를 따라 충주호가 형성되었다.
역 사 : [고대] 삼국시대에 백제에 속하였으나 고구려의 내토군이 되었다가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어 757년(경덕왕16) 내제군으로 개칭되었으며 삭주 북원경에
소속되었다. [고려] 940년(태조23) 제주군으로 고쳤고, 992년(성종11) 의
원.의천 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995년(성종14) 중원도에 속하으며 1018년
(현종9) 제주는 원주에 소속되었고, 청풍은 충주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 1413년(태종13) 제천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근대] 1895년 제천과 청풍이 각각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 청풍군이
제천군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제천이 교통의 요충지가 되면서, 청풍은 제천
군에 편입되었다. 1940년 제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현대] 1980년 제천
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제천군은 제원군으로 변경 되었으나, 1991년 제천군으
로 다시 환원되었다. 1995년 1월 1일에는 전국 시군 통합에 따라 제천군과
제천시가 통합하여 제천시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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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 : 문화제 - 농경문화의 상징인 의림지와 의병의 발상지로서 수많은 의인(義人)
들이 배출된 역사적 의미를 합쳐 이름 붙여진 의림문화제는 1985년 이후 매
년 3-4일간 거행되었으나, 1995년 제천의 병창의 100주년을 맞아 제천의병
제로 개칭되어 연례행사로 치루어진다. 주요 행사로는 의병제.청풍낙화놀이.
흑석회다지.오티별신제 등을 중심으로 각종 전통민속행사.예술행사.전시 행사.
청풍명월 공주선발 등이 있다.
특히, 의병제는 애국 애족 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의병탑에서 지내는 유교식
제례이며, 국태민안을 위한 청풍낙화놀이는 조선 중엽부터 전승되어온 이 고장
특유의 행사로서 배를 타고 행하는 불꽃놀이다.
민 속 :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날에 행해지는데, 마을 사람들이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
어 동편에서는 수줄을, 서편에서는 암줄을 만들어 걸어놓고 농악대의 응원을
받으며 줄을 당긴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은 이긴 편에서 작두로 잘라 거름으로 쓰는데 이 거름으
로 농사를 지으면 대풍이 든다고 한다. 이 지방의 줄다리기는 풍년의 기원 외
에도 지신(地神)을 누르기 위한 것이라는 민간 신앙적 요소도 있다. 장치기는
들이나 밭에서 청년들이 편을 갈라 긴 장대로 둥글게 만든 짚 뭉치를 때려
양쪽에 세워놓은 지겟다리 사이에 넣는 놀이다.
동 제 : 산신제는 대개 음력 정월 14일 밤에 지내고 서낭제는 15일 아침에 지낸다.
교 통 : 중앙선.태백선.충북선의 3개 철도가 북부를 지나며, 국도 3개 노선, 지방도 2
개 노선, 군도 14개 노선이 사방으로 뻗어 있어 아주 편리하다.
관 광 : 의림지, 능강구곡, 도화동천, 송계팔경, 용하구곡,금수산, 용담폭포, 청풍호반,
박달재등
2. 의림지
위 치 : 충청북도 제천시 모산동 241
관 리 청 : 제천시청, 제천농지개량조합
개 요 : 충청북도 기념물 제 11호인 의림지는 삼한시대에 축조된 저수지로 본래 임지
라고 했다. 호반둘레 1.8km, 만수면적 151,470㎡, 저수량 6,611,891㎡,
수심 8~13m의 대수원지로 289.4정보의 농지를 관개한다.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 수리시설 가운데 하나로, 수구를 옹기로 축조
하여 당시의 농업기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는 제천
지방의 경승지로, 호수 주변에는 순조 7년(1807년)에 세워진 영호정과 1948
년에 건립된 경호루 그리고 수백년을 자란 소나무와 수양버들, 30m의 자연폭
포 등이 어우러져 풍치를 더하고 있다. 특히 특산물로서, 산란하는 해빙기에
만 볼 수 있는 빙어가 있는데, 회어로서 진미를 맛볼 수 있어 관광객들에게 각
광을 받고 있으며 주위에 솥밭공원, 야외수영장, 국궁장, 파크랜등등이 조성되
어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있다.
소 개 : 제천시의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4km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천의 명소인 의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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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林池)가 눈앞에 펼쳐진다. 의림지는 지방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됐고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밀양의 수산제(守山堤)와 함께 삼국시대의 수리시설로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풍수설에 의하면 의림지는 호반 북쪽에 우뚝 솟은 용두
산의 정기가 뻗어내린 곳에 생긴 못이다. 용두산의 정기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데 좌청령(左靑龍)은 송학산을 뒤로 감싸주고 배재에서 잠시 눌렸다가 동남쪽
으로 솟아올라 조리새에서 강원도와 접경을 이룬다.
우백호(右白虎)는 치악에서 흐른 감악산을 품에 품고 차령산맥을 뒤로 한 뒤
구학산을 거쳐 백운산으로 이어지고 다시 천등산 박달재로 넘어간다.
여기서 떨어져 흐른 내룡(內龍)과 내호(內虎)는 의림지를 깊이 움켜쥐고 있다
가 품에서 풀어 헤치면서 모산(茅山) 푸른 들에 만경창파를 이루고 푸른 물결
이 끝나는 곳에 제천시가지가 생겨 났다고 풍수설은 전한다.
의림지는 본래 임지(林池)라고 했으나 고려 성종 11년(992)에 군현이 명 칭
을 개정하면서 제천을 의원현(義原縣) 또는 의천(義泉)이라 별칭하였으니 그
후에 제천의 옛 이 름인 義자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축조된 명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구전에는 신라 진흥왕 때 악성 우륵이 지
금의 의림지 동쪽에 있는 석봉에 머물면서 가야금을 벗삼아 선유하며 축조를
시작했다고 하고 일설에는 그로부터 7백년 뒤에 현감 박의림이 축조 하였다고
한다. 의림지의 특산물인 공어는 정확한 명칭이 빙어이며 이를 잡아 회(膾)를
해서 먹으면 담백한 진미를 맛볼 수 있어 의림지 공어회는 전국적으로 유명하
다. 공어와 함께 의림지의 특산 물로 궁중에 진상된 순채는 1941년에 송학면
무도리 만지실 못에 이식하였으나 지금은 그 못이 없어져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수문(水門)을 거쳐 십이 척의 계곡으로 떨어지는 용폭(龍曝)과 연 자바
위 우륵당과 우륵대지,후선각지, 의림정지, 진구헌지, 임소정지, 청폭정지, 홍
류동, 유만(柳彎) 등이 유서깊은 유원지로서의 의림지의 진가를 말해주고 있고
제방 위의 노송(老松)도 수백 년 역 사를 묵묵히 증언하며 운치를 더해준다.
3. 제천장락리 칠층모전석탑(堤川長樂里七層模塼石塔)
충북 제천시 장락동에 있는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의 7층 석탑. 보물
제459호. 높이 9.1m. 회흑색 점판암을 잘라서 축조한 모전석탑으로, 단층의
기단은 몇 개의 자연석으로 짰으며,탑신부의 1층 네 모서리는 높이 1.37m,
너비 0.21m의 화강암 기둥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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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풍 문화재단지
위 치 :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관 리 청 : 청풍문화재 관리사무소(0443-47-7003)
개 요 : 충주호를 굽어보는 호수의 산마루에 자리잡고 있는 청풍문화재단지는 충주댐
건설로 인해 청풍의 옛날 화려한 이름만을 전설처럼 남긴채 물에 잠기게 되자
1983년부터 3년여에 걸쳐 현재의 위치로 이전 되었다. 이 곳에는 한벽루,
금남루, 팔영루, 응청각, 청풍향교고가등 보물 2점, 지방유형문화재 9점, 비지
정문화재 32점과 생활유물 1,600 여점이 전시 되어 있어 옛 선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청풍문화재단지가 위치한 물태리에서 제천까지 약 10km
구간은 충주댐 건설로 인한 청풍호반 조성시 아름다운 금수산 5부능선 상으로
만들어진 구불구불한 도로라 이길을 달리면 한편에는 금수산의 기암괴석이
보이고 아래로는 청풍호반의 물이 드리워져 있어 주변경관이 빼어난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이다. 또한 이 거리는 청풍호 조성후에 식재된 벚나무들이 몇년
전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해 새로운 벚꽃길 명소로 떠오르는 길이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4월 중순쯤 제천시에서는 올해 처음으로 축제를 기획해
청풍문화재단지 인근마을에서 벚꽃축제 행사가 개최된다.
ㅇ 벚꽃축제 행사는 전야제로 연등행사와 용신제를 올리며, 본행사로는 식전, 식
후 행사로 구분하여 민속경기와 체육경기가 읍.면.동 대항전으로 실시하여
시민의 화합의 장이 되며, 부대행사로는 벚꽃 사진 촬영대회가 있으며, 향토음
식 시식코너를 개설하여 이지방의 별미를 맛볼수 있는 자리도 마련된다. '97년
축제기간은 4.15-16일 실시.
ㅇ 제천의 청풍문화재단지 청풍은 말 그대로 청풍명월의 고장- 산수 수려한 이곳
은 예로부터 남한강을 이 용한 수운이 발달하여 문물이 번성했던 곳으로 이미
고려때에 군으로 승격된 이름난 곳. 충주댐 건설로 청풍의 27개마을중 25개
마을이 수몰되어 그곳에 있 던 유서깊은 유적들을 이곳 문화재 단지에 옮겨
놓았다. 관아의 연회장이었던 독특한 건축양식의 한벽루·관문인 팔영루·청풍
부의 동헌이었던 금병헌등 건축물과 고가·지석묘·문인석등 볼거리가 있다.
뒷쪽으로 충주호의 경관을 내 려다 보는 맛도 각별하다.
ㅇ 청풍한벽루(淸風寒碧樓)
충청북도 제천시에 있는 누각. 보물 제528호. 1317년(충숙왕 4)에 세운 건물
로 정면 4칸, 측면4칸이의 주심포계 팔작지붕이다. 석축토단의 덤벙주초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깐 뒤 주위에 계자난간을 돌렸다. 누각에는 추사
(秋史) 김정희(金正喜)의 ‘淸風寒碧樓’라고 쓴 편액이 있다.문화재-보물:한
벽루,석조여래입상,지방문화재 : 한벽루, 금병헌, 팔영루, 응청각, 청풍향교,
고가4동,비지정문화재 : 망월산성외 32점, 생활용품 : 1600여점.
ㅇ 지방 유형문화재 35호인 팔영루(八詠樓)가 보인다. 이것은 청풍부를 드나들던
관문으로 조선 숙종 28년(1702)에 부사 이기홍이 현덕문이라고 했다가 고종
7년(1807)에 부사 이직현이 중수 후 팔영루라 명했다고 전해진다. 팔영루
통로 천정 나무판에는 대호가 살았는 모습의 그림이 있다.
ㅇ 지방 유형문화재 20호 금남루(錦南 樓), 지방 유형문화재 90호 응청각(凝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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閣)과 지방 유형문화재 64호인 청풍향교가 있어 작은 고을을 연상케 합니다.
청풍은 예로부터 남한강 물줄기를 끼고 있어 수로가 발달, 자연 상업의 중심지가 돼 고려충숙왕 4년에 군(郡)으로 승격되고 1660년 조선 현종 원년에는 명성왕후가 이곳에서 간
택된 것으로 인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래서 이곳엔 많은 문화유적이 남게 되었다. 한벽루, 팔영루, 금병헌, 금나루 같은 문화재들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충주댐 건설로 인해 이러한 문화유적이 유실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관계당국과 주민들은 청풍이 수몰되더라도 귀중한 문화재를 다른 곳으로 옮겨 청풍의 역사를 보존하기로 결정, 1982년 충북도청은 4년에 걸쳐 물태리 망월산성 기슭의 5만4천4백86평방미터의 터 위에 청풍문화재 단지를 조성하여 물 속에 잠기게된 많은 문화재를 옮겨다가 복원시켜 작은 민속촌을 만들어 놓았다. 청풍문화재단지는 작은 고을을 연상케 한다. 전통 문화재를 찾아 조상들의 숨결을 음미할 수 있고 유람선을 타고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청풍 문화재단지를 한 번쯤 찾아 보는 것도 퍽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5. 배론성지
위 치 :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관 리 청 : 배론성지 (0443-42-4527, 43-3408)
개 요 : 제천 <--> 원주간의 국도변에 위치한 배론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
지로 천주 교회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제천지방의 성지로 1801년 신유박
해 때 황사영이 당시의 박해상황과 천주교도의 구원을 요청하는 배서를 토굴
속에 숨어 집필한 지역이며 1855년(철종6년)에서 1866년(고종3년)까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론 신학교가 소재했던 지역이다.
또한 1861년 별세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김대건신부에 이어 두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분묘가 소재한 지역인 동시에 1866년 병인박해의 첫 순
교자인 남종삼이 출생한 지역(산넘어 묘재)이다. 배론성지는 지리적으로 치악
산 동남기슭에 우뚝솟은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이 둘러싼 험준한 산악지대로
외부와 차단된 산골이면서도 산길로 10리만 가면 박달재 마루턱에 오르고, 이
어 충주 청주를 거쳐 전라도와 통하고, 제천에서 죽령을 넘으면 경상도와 통하
며 원주를 거쳐서 강원도와도 통할 수 있는 교통의 길목으로 배론이란 지명은
이 마을이 소재한 산골짝 지형이 배모양이기 때문에 유래한 것으로 한자 새김
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徘論)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행정지명
으로 제천현 근석면 팔송정리 도점촌으로 옹기를 굽던 곳이다.
배론에 천주교도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정조15)진산
의 윤지충의 신주사건으로 일어난 신해박해로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모여들어
교우촌으로 형성되었고, 배론성지는 17세기말 전교되었으며, 1911년 경성교
구에 속해 있다가 1958년 원주교구에 소하였다.
黃嗣永 1775~1801(영조51~순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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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천주교도. 자는 덕소(德召). 세례명은 알렉산드르. 본관은 창원. 1790년(정조 14) 정약종(丁若鍾)에게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도가 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조선 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책을 호소하는 이른바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를 황심(黃沁)· 옥천희(玉千禧) 등에게 시켜 베이징〔北京〕에 있는 주교(主敎)에게 전달하려다가 실패하여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黃嗣永白書란 천주교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적어 베이징〔北京〕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고자 한 밀서이며 백서의 내용은 신유박해의 상세한 전개과정, 순교자들의 소개,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활약상, 조선 교회의 재건책으로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하게 하거나 서양 군대를 보내 조선에 압력을 가하도록 하는 것 등이 있다. 지금 원본은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러분은 박달재의 애닯은 사연을 아시나요?
박달재 고갯마루의 팔각정에서 흘러나오는 '울고 넘는 박달재'의 구성진 가락이 서로를 그리워하다 죽은
박달과 금봉의 넋을 달래고 있다. 충주를 지나 제천군에 들어서면 박달재의 전주곡이라 할 수 있는
다릿재가 나온다.
다릿재를 넘어오면서 쌓였던 긴장과 피로를 이곳에서 풀자 마자 바로 박달재다.
아흔아홉 굽이 30리 고갯길을 굽이굽이 넘어가며 재 너머로 펼쳐지는 천하절경에 모두들 넋을 읽게 된다.
제천군 백운면과 봉양면의 접경을 이루는 이 고갯길은 지금은 포장돼 10여 분이면 재를 넘을 수있지 만
옛날에는 박달재와 천등산재를 넘으려면 몇 날 며칠을 걸어야 했다고 한다.
또 고갯길이 워낙 험하고 가파른데다 박달나무가 우거져 호랑이 같은 산짐승들이 불시에 튀어나오는
것은 물론 도둑까지 웅거하고 있어 이 곳을 넘는 새 색시는 두 번 다시 친정을 오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친정이 그리워도 다시는 갈 수 없는 슬픔에 시집가는 새색시가 눈물을 쏟는다 해서
'울고넘는 박달재'가 되었다 한다. 박달재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조선조 중엽 경상도에 살던 젊은 선비 박달(朴達)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길에 백운면 평동리에
도착했다. 박달은 한 농가에 찾아들어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 집에 살던 금봉이라는 처녀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몇일을 묵 게 되었다. 서로 사랑하게된 이들은 渼事 과거에 급제한 후 함께 살기로 굳은 언약을
하였다. 그러나 박달은 과거 시험장에 나가서도 금봉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어 낙방하였다.
금봉을 볼 면 목이 없는 박달은 평동에 가지 못했다. 박달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금봉은 박달이
떠나간 고 갯길을 박달의 이름을 부르며 오르내리다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채 죽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른 뒤 사흘째 되던 날 낙방거사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왔다.
금봉의 죽음을 알게된 박달은 목메어 울며 고갯깃를 바라보니 금봉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고갯 마루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금봉의 뒤를 쫓아 달려가 아슬아슬하게 금봉을
잡았 으나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