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만남

퇴계 할베 종가 가는길 (1) 예천 용문사, 봉화 청량산

南塘 2011. 8. 16. 10:20

2011년 8월 13일(말복) 제천 왕박제(王朴齊)를 09:30분에 떠나 경북예천 용문산 용문사로 향했다  용문사는 소백산 연화봉과 맛된 도솔봉 지맥의 용문산 중턱에 자리 잡은 제일의 명당터에 자리 잡고 있다. 용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산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870년(경문왕 10) 두운조사(杜雲祖師)가 창건했다. 〈사적기 寺蹟記〉에 의하면 936년 태조가 직접 중건했고, 1165년(의종 19) 왕명으로 중수했다고 한다. 1171년(명종 1) 태자의 태를 일주문 밖 자비봉두에 묻은 다음 절 이름을 용문산 창기사(昌基寺)라고 바꾸었고, 1179년부터 15년간에 걸쳐 대대적인 불사가 이루어졌다. 1478년(성종 9)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실을 봉안하고, 절 이름을 성불산 용문사라고 다시 바꾸었다. 1783년(정조 7)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태실을 이곳에 쓰고 성불산을 소백산으로 고쳤다. 1835년(헌종 1) 화재로 소실된 것을 역파(櫟坡)대사가 상민(尙敏)·부열(富悅) 등과 함께 중건했다. 현존 당우로는 보광명전·대웅전·응향각(凝香閣)·응진각·명부전·응진전·회전문·범종루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대웅전(보물 제145호)·윤장대(輪藏臺:보물 제684호)·용문사교지(보물 제729호)가 있고, 강희23년(康熙二十三年) 명문이 있는 대장전목각불탱(보물 제989호) 등이 있다. 영주에서 IC에서 28번국도 4차선(울진-문경)으로 갈아 타고 예천 읍내로 진입하여 928번 지방도로를 통해 용문사에 다달른다. 10년이면 강산이 2번이나 바뀌는 세상에 새로 지은 보광명전과 용문사 박물관 이외에는 고즈넉한 옛모습 그대로이다. 용문사 박물관에 새로 만들어 관람인에게 실습이 가능케한 윤장대를 돌리면 올해 나의 마음을 빌어 보았다. 덕을 쌓아야 되는 일들이지만, 대웅전과 內에 윤장대를 차례로

돌아 보면서 선인들의 아름다운 예술감각에 탄복할 뿐이다. 지나는 가족이 있어 용문사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해 주고 참된 여행이 되기를 당부 했다. 돌아 나오는 길 안동 하회마을로 갈까 아님 봉정사로 갈까 망설이다. 하회마을이 관광에 매우 불편한 인프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정보를 접해서인지 오던 28번도로를 이용 영주를 걸처 봉화로 길을 잡는다.  이길도 20년전 다여보고 가는 길이니 초행길이나 같은 의미이다. 봉화읍을 지나면서 닰실마을 이정표가 눈에 들어 온다. 닭실 마을은

봉화군 봉화읍 유곡1리에 자리잡고 있는 닭실마을은 봉화지역의 대표적인 집성촌으로 안동 권씨 가운데 충재 권벌(沖齋 權 : 1478-1548)을 중심으로 한 일족의 집성촌이다
닭실마을(酉谷)은 권벌이 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때 파직 당하여 물러나와 1521년 파평(坡平) 윤씨(尹氏)의 터전이었던 내성(柰城) 유곡에 입향하여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였다. 춘양의 한수정(寒水亭)은 권벌이 춘양(春陽) 현감으로 있을 때 지은 정자다. 권벌이 이 지역에 입향한 이후에 이 지역의 농장을 개설하고 국가에서 받은 토지를 바탕으로 내성과 춘양현 일대에 안동 권씨의 일족이 널리 분포하게 되었다. 닭실마을, 즉 유곡(酉谷)은 조선시대에 내성현(奈城縣)에 속한 곳으로 원래 봉화(奉化)지역에 해당되는 곳이었지만 안동부(安東府)에 소속되어 있었다.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복거총론(卜居總論)>에는 유곡과 관련된 내성촌(奈城村)과 춘양촌(春陽村)은 우리나라 4대 길지에 속한 마을 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1751년(영조 27년)에 저술한 인문지리서에서 이 지역을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내앞마을, 풍산의 하회마을과 함께 삼남지역의 4대 길지로 논하고 있다) 춘양에서 35번 도로를 이용해서 이번 여행의 2번째 목적지인 청량산에 도착했다. 함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525km 흘러 남해에 다달른다.  특히 지류인 내성천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세계사) 토사를 잠재한 강으로 문화적 가치 보존의 가치가 높다. 청량산으로 향하는 35번 도로와 같이 가는 낙동강에서는 불어난 물에도 아랑곳 없이 래프팅이 한참이다. 우리 가족도 한번 다같이 도전해 보고 싶은데.. 봉호면 청량산 초입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을 한참 지나서 먹거리를 찾아 볼 요량으로 도립공원 내로 들어 가본다. 낙동강 다리를 건너서 5~6km 계곡으로 들어 갔는데. 만만하 먹거리 식당은 없다. 다시 돌아 나와 맹호면 청량산 관광단지내에 "까지소리" 맛깔스런 더덕정식, 산채비빔밥, 송이덮밥을 저렴한 가격에 즐기고 청량산으로 다시 향한다. 청량산은  높이 870m. 태백산맥의 지맥에 솟아 있으며, 주위에 문명산(894m)·만리산(792m)·투구봉(608m) 등이 있다. 주봉인 장인봉을 비롯하여 금탑봉·연화봉·축융봉·경일봉·선학봉·탁필봉 등 30여 개의 봉우리들이 있다. 기반암은 편마암이다. 예로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렸으며, 우리나라 3대 기악(奇嶽)의 하나로 꼽혀왔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태백산맥에서 들로 내려오다가 예안강 위에서 고개를 이루었다. 밖에서 바라보면 단지 수개의 꽃송이와 같은 흙산 봉우리뿐이다. 그러나 강을 건너 골짜기 마을로 들어가면 사면이 돌벽으로 둘렸는데 모두 대단히 높고 엄하며, 기이하고 험하여 그 모양을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라고 표현했다. 퇴계 이황도 청량산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 산을 예찬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여 세운 청량정사(淸凉精舍)가 남아 있다. 그리 높지는 않으나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낙동강 상류가 서쪽 절벽을 휘감아 흐른다. 소나무·단풍나무 등이 우거져 있으며 산정부에는 칡덩굴·다래덩굴·노박덩굴 등이 엉겨 있다. 산 일대 면적 48.76㎢가 1982년 8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아슬아슬한 암봉·망굴 등의 자연경관을 비롯하여 내청량사·외청량사 등의 고찰과 유적이 많다. 산의 남쪽 연화봉 기슭에 내청량사가 있으며 조선 후기의 불전건물인 청량사유리보전(淸凉寺琉璃寶殿: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이 있다. 산의 동남쪽 금탑봉 기슭에 있는 외청량사는 높은 절벽 중간에 있으며 최고 절경으로 꼽히는 어풍대와 잘 조화되었다. 남쪽 축융봉에는 고려 공민왕이 피난와 있던 청량산성과 공민왕당(恭愍王堂)이 있다. 그밖에 신라 명필 김생이 글씨를 공부한 곳으로 알려진 김생굴, 최치원이 수도한 곳으로 알려진 고운대 등이 있다. 청량사까지는 주차장에서 험한 언덕길을 800m를 올라야한다. 헉헉 거리는 더위에서 반가운 사찰은 이름에 걸맞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다. 처음 만나는 건물이 새로 지은 안심당이다 이건물은 오가는 불자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곳이다. 그리고 유리보전에는 약사여래좌상과 협시보살인 지장보살과 문수보살이 봉안되어 있으며, 유리보전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전해온다.  유리보전 앞에 새로 조성한 5층 석탑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전통 양식의 틀은 유지 했지만 정삼각형의 비례감이 매우 떠어지고 기단부와 탑시부의 균형감각이 떨어 진다. 또한 상륜부에는 노반,복발,양화, 보륜, 보개,수연,용차, 보주, 찰주와 같은 세세한 전통 탑모슴이 없는것이 쓸쓸함을 남긴다. 천년, 만년을 이어갈 문화유산을 만든다는 신념으로 만들어 세웠으면하는 아쉬움이 너무 크다.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면 말복날 땀을 식히고 오가는 등산객의 해 맑은 모습에 산을 오르고 싶지만 장비를 갖추지 않고 산에 오르는 것은 산 사람으로서의 기본자세가 안되어 있어 민망할 따름이다. 태고의 멋을 간직한 청량산을 다시 방문할 것을 가슴에 다지며 청량사에서 근접하여 조망한 연화봉, 연적봉, 자소봉의 아름다움만으로 위안을 가진다. 돌아 내려 오는길에 만나는 작은 포폭들 옹기종기하 들꽃들, 오가는 사람의 발소리 만큼이나 정겨움을 가지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에 도착하기 직전 말벌들의 습격으로 내자와 딸이 공격을 받아 응급상황이 발생하였다. 20km를 달려 온해면 보건지소, 진료소를 찾았는데 아뿔사 오늘이 토요일 소방지소에 들려 응급조치를 받은 수 퇴계 할베 도산서원으로 향한다.   

 

 

 

 

 

 

 

 

  

  

계속해서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