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질경영

조선의 선비에게 배운다

南塘 2008. 7. 19. 10:34
[조선의 선비에게 배우다] 여러분의 인생에는 ‘서권기 문자향’이 있습니까?
  
   

국민 여동생 문근영과 파리의 연인 박신양이 최근 시서화((詩書畵)를 배우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합니다. 하반기에 방영될 ‘바람의 화원'이라는 드라마에서 이 두 사람이 각각 천재 화가 신윤복과 김홍도로 등장하기 때문이라지요. 옛 선비들은 학문에서도 뛰어났지만, 화가나 시인 못지않게 시서화에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업무 능력을 키우기 위해 전문 지식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옛 선비처럼 시서화를 한번 배워 보면 어떨까요? 21세기는 창조적 인간의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들이 우리에게 새로운 지혜, 새로운 크리에이티브를 가져다 줄지도 모를 일입니다. 


시ㆍ글씨ㆍ그림은 셋이 아니라 하나의 장르다

시서화란 글자 그대로 시와 글씨와 그림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모두에 뛰어난 사람을 ‘삼절(三絶)'이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시, 서, 화'가 아니라 ‘시서화'라는 사실! 시서화는 밥 따로 국 따로 먹는 따로국밥이 아니라, 한데 모여 어우러지는 비빔밥입니다.

시서화 삼절은 시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쓰고 그림까지 잘 그리는 팔방미인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한 화면 속에서 세 가지 요소를 잘 버무려 냈다는 측면이 강합니다. 즉 시서화란 이질적 요소들의 긴밀한 만남이자 융합인 것이지요.

 

 시서화는 '시, 서, 화' 세 개의 합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시서화이다.
시와 글씨와 그림이 하나의 화폭에서 잘 어우러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옛 그림을 보면 뭐라 뭐라 한문이 쓰여 있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이렇게 그림을 그린 후 쓴 글을 화제(畵題)라고 하는데요, 그림을 통해 다 나타내지 못한 의미나 그림을 그린 이유 등을 적어 넣은 것이지요. 때로는 감상자가 작품평을 한 경우도 있습니다만, 화제는 보통 고사(故事)나 기존의 유명한 시구를 인용해 쓰는 등 시가 주종을 이룹니다. 판화가 이철수의 작품에도 그림과 글이 함께 나타나는데, 이를 시서화의 현대적 변용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시서화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교양필수였다

오늘날 미술 과목은 미대 입시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미대 지망생도 정규 수업을 통해 미술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미술학원을 다니며 별도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영어ㆍ수학에만 치중하느라 미술 같은 예능 과목은 수업시간표에만 존재하는 무게감 없는 과목이 되었지요.

하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시서화는 교양필수 과목이었습니다. 진정한 선비가 되는 데 시서화를 빼놓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지요. 사람들은 흔히 선비를 학문 이외의 것에는 결코 눈길을 돌리지 않는 ‘범생이형'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의 선비를 논할 때 시서화를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지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룬 인격체를 추구했다.
때문에 학문은 물론 시서화에 매진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지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룬 인격체를 완전한 인간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학문을 통해 지성을 배양하는 것 못지않게 예술을 통해 말랑말랑한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비들은 시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시회를 여는가 하면, 그림을 그린 후 서로 돌아가며 감상하는 품평회를 빈번하게 가졌습니다. 풍류의 이면에는 이렇게 감성 훈련이라는 지상 과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적인 인간형에 다가서기 위해 쑥과 마늘을 먹는 대신 붓과 종이를 들었던 선비들…. 이름난 옛날 선비들이 저마다 그림을 남기고 있는 것만 봐도 이러한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매화병제도'를 비롯해 여러 점의 산수화를 남긴 다산 정약용, ‘소림청장'을 그린 백사 이항복, 대나무와 매화를 소재로 삼아 ‘월야삼청'을 그린 미수 허목, 그리고 <열하일기>로 유명한 박지원도 ‘국죽도'를 그렸습니다.


 "가슴 속에 만 권의 책이 있어야 그것이 넘쳐 그림과 글씨가 된다"

선비들이 시서화를 중하게 여기긴 했지만, 한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손끝의 잔재주 대신 정신의 품격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추사 김정희는 “가슴 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입니다. '서권기'란 책에서 나오는 기운을 말하며, '문자향'이란 글자에서 나오는 향기를 뜻합니다. 물론 아무나 서권기 문자향의 경지에 다다를 수는 없겠지요. 그만큼 풍부한 학식과 고매한 인격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오원 장승업이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렸어도 서권기 문자향이 없다고 폄하받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서권기 문자향은 참다운 선비되기의 치열한 수련 과정 속에서 더욱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책에서 나오는 기운을 가리키는 '서권기', 글자에서 나오는 향기를 뜻하는 '문자향'.
옛 선비들은 풍부한 학식과 고매한 인격이 뒷받침되면
서권기 문자향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서화는 그것의 현현이었다.
서권기 문자향이란 말에는 곧게 뻗은 나무의 오롯한 품격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선비들은 왜 서권기 문자향을 시서화의 평가 기준으로 삼은 것일까요. 옛날의 화가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드라마 ‘이산'에 나오는 이천이나 탁사용처럼 도화서에 소속돼 그림을 그리는 직업 화가이고, 다른 하나는 ‘문인 화가'라고 불리는 사대부들이었습니다.
화가를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눈 사람은 중국의 동기창입니다. 중국의 회화사를 정리하고 화가들의 계보를 만들면서 이 양반이 문인 화가들을 남종화 화가로, 직업 화가들을 북종화 화가로 구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동기창은 남종화는 높은 학문과 고매한 풍성을 지닌 그림이요, 북종화는 정신성이 없는 환쟁이의 그림이라고 했지요. 이 같은 분류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선비들의 내면 세계가 담긴 문인 취향의 그림이 득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에 이르러 절정을 맞습니다.
선비들이 사군자를 즐겨 그렸던 것도 이 같은 배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매화ㆍ난초ㆍ국화ㆍ대나무 등 사군자의 덕목이 군자의 품성과 같다고 생각한 선비들은 사군자를 그리며 그 속에 자신의 내면 세계를 담아 냈습니다. 추사의 난초 그림이 훌륭한 건 난초를 외형적으로 잘 묘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뛰어난 정신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추사의 ‘불이선란'을 한 번 보세요. 준엄한 기상이 단박에 느껴질 겁니다. 이렇게 시와 그림과 글씨가 한데 어우러진 시서화는 문학과 미술 그리고 학문과 감성 계발이 만나 빚어진 선비 정신의 표상이었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화폭에 담았던 시서화 삼절

▣ 강희안 _ 진흙에서 피어나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우리 선비들 중에는 시서화의 대가로 꼽을 만한 사람이 여럿 있었습니다. 우선 조선 초기의 문인인 강희안을 들 수 있습니다. 강희안은 <양화소록> 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자신이 직접 꽃과 나무를 키우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를 썼습니다.

그는 꽃과 나무에 상징성을 부여해 화품(花品)을 매긴 후 인간이 그러한 덕목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예컨대 연꽃은 진흙에서 피어나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니 군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가 꽃을 키우며 깨달았던 세상의 이치는 그의 시서화에도 오롯이 나타나 있습니다.
 

▣ 강세황 _ 평생을 재야에 묻혀 자신을 갈고닦은, 김홍도의 스승

표암 강세황 역시 시서화 삼절로 거론되는 사람입니다. 사실 강세황은 단원 김홍도의 스승으로 더 유명해, 청출어람의 본보기로 흔히 지목되곤 합니다. 하지만 사실 표암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산수화를 비롯해 인물화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서양화의 원근법을 도입할 정도로 진취적인 사람이기도 했지요.

표암은 “내 안에 대단한 학식과 포부가 있다고 자부한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중국의 명필가 왕희지, 그림을 잘 그렸던 고개지, 시를 잘 지었던 한퇴지를 본떠 자신의 이름을 ‘광지(光之)'라고 지었겠습니까. 표암은 자신이 이 세 가지를 모두 잘한다는 의미에서 광지라는 이름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표암이 오만한 지식인이었던 건 결코 아닙니다. 표암은 아버지가 예조판서를 지낼 때 부정을 저지른 일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재야에 묻혀 시서화에 몰두하며 자신을 갈고 닦았지요.

표암은 정조가 “육십 평생 자숙을 했으니 이제 그만 노인 과거를 치르라”고 하자 그제야 시험을 치렀습니다. 결과는 장원급제였지요. 그만큼 표암은 저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스승을 두었기에 단원 김홍도 역시 시서화에 출중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청출어람이란 게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건 아닌 듯합니다.

▣ 조희룡 _ 중인의 울분을 시서화로 달래다

김홍도 외에 또 하나의 청출어람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호산 조희룡입니다. 19세기 전ㆍ중반기에 활동한 조희룡은 우리에게 낯선 인물입니다. 하지만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그의 매화 그림을 보게 되면 조희룡이라는 이름 석 자를 결코 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조희룡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시서화를 겸비한 중인층 지식인이 대거 등장했던 시기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난초도 환경과 처지에 따라 귀천이 정해진다”며 중인이었던 자신의 신분을 한탄했던 조희룡은 출세하지 못하는 울분을 시서화를 통해 달랬습니다.


인생의 화폭에 담아야 할 '서권기 문자향'

그리고 여기에 또 한 사람, 운미 민영익이 있습니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사랑을 독차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조정의 인사권을 장악하는 이조참의가 되었지요.

서울에서 만국박람회를 개최해야 한다고 역설한 개화사상가이기도 했던 그는 명성황후 시해와 국운의 쇠퇴 속에서 모든 희망을 포기한 채 시서화에만 전념했습니다. 망해 가는 조국과 무너진 가문의 영광에 대한 울분을 시서화로 달랜 것입니다.

나라를 잃으면 난을 그리면서도 흙은 그리지 않는다는 고사에 따라 그는 ‘노근묵란도'라는 그림에서 난초의 뿌리를 드러내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지요. 내면 세계를 반영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뿌리 드러낸 저 나무는 자신의 어떤 심경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시서화는 선비들의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했다.

이처럼 시서화에는 추구하는 가치,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향, 세상에 대한 깨달음 등 한 사람이 깨우친 삶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학예일치, 즉 학문과 예술을 일치시켜야 이상적인 인간이 된다고 믿었던 우리 선비들을 닮아 보는 건 어떨까요. 인생이라는 화폭에서 당신의 서권기 문자향은 얼마나 그윽하게 피어오르고 있는지요.


- 글

지근화 / 자유기고가